권진(權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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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2년(선조5)∼1624년(인조2) = 53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운경(雲卿)이고, 호는 수은(睡隱)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인데, 권근(權近) · 권제(權踶) · 권마(權摩) 계통의 집안으로 경기도 포천(抱川)에 거주하였다. 권현(權晛)의 아들이고, 이희삼(李希三)의 외손자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선조 말년에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보임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1599년(선조32) 병조 · 형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1602년(선조35)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 ·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으로 옮겼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1609년(광해군1) <임해군(臨海君)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1613년(광해군5) 우승지(右承旨)로 있을 때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다루었는데,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되었다. 1618년(광해군10) 한성부 판윤(判尹) ·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고, 1622년(광해군14) 숭정대부(崇政大夫)병조 판서에 이르렀다.

인조 반정 이후 수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김류(金瑬) · 홍서봉(洪瑞鳳) 등의 부탁을 받고 제위(諸衛)의 군사를 모아 궁궐을 호위하여 반정을 도왔다. 그러나 김자점(金自點)이 그를 싫어하여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그가 형방 승지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다고 무고하여, 경상도 양산(梁山)에 유배시켰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 때, 김자점의 사주를 받은 경상도관찰사민성휘(閔聖徽)가 그를 참형에 처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포천(抱川) 선산(先山)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1695년(숙종21) 신원(伸寃)되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첫째 부인은 청송심씨(靑松沈氏)심용(沈蓉)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풍산심씨(豊山沈氏)심일취(沈日就)의 딸이다. 자녀는 아들 하나로, 권수(權脩)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朝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우정집(憂亭集)』
  • 『오리집(梧里集)』
  • 『월사집(月沙集)』
  • 『상촌집(象村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잠곡유고(潛谷遺稿)』
  • 『도곡집(陶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