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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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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반 |
한글표제 | 무반 |
한자표제 | 武班 |
대역어 | 서반(西班), 호반(虎班) |
동의어 | 무관(武官), 무신(武臣) |
관련어 | 동반(東班), 문반(文班), 문신(文臣)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조 ~ 고종 |
집필자 | 한충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반(武班) |
조선시대에 중앙의 군사아문과 지방의 도(道)·진(鎭)에 편제되어 군사를 지휘한 무관의 관직.
개설
조선시대의 무반(武班)은 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시대 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경외(京外)에 4,400여 직의 정직(正職)과 10여 직 이상의 겸직(兼職)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문반 당상관 중심의 국정 운영, 관제 정비, 재정 절감 등과 관련되어 수시로 개변되었다. 그 뒤 830여 정직과 4600여 체아직(遞兒職) 및 30여 겸직의 경직(京職)과, 110여 정직과 400여 체아직 및 350여 겸직의 외직(外職)으로 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이 관제가 다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간행된 1865년(고종 2)까지, 군영아문의 설치 및 변진(邊鎭)의 증치 등에 따라 개변되면서 경직은 370여 정직과 1,440여 체아직 및 140여 겸직으로, 외직은 300여 정직과 410여 겸직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큰 변동 없이 1894년(고종 31)의 근대식 관제 개편 때까지 계승되면서 운영되었다.
무반직은 크게 그 관직이 속한 관서의 소재지에 따라 경직과 외직으로 나뉘고, 다시 경직은 정직·겸직, 녹직(祿職)·무록직(無祿職), 당상직(堂上職)·당하직(堂下職)·참상직(參上職)·참하직(參下職), 직계아문직(直啓衙門職)·육조속아문직(六曹屬衙門職) 등으로 구분되었다. 녹직은 정직과 체아직으로 나뉘었는데, 무반의 대부분을 차지한 오위(五衛)의 군직은 소수의 정품직(正品職)만이 정직이고 대다수의 종품직(從品職)은 모두 체아직이었다. 무반직은 무산계(武散階)를 지닌 사람에게 제수되었는데, 여기에는 무과 급제자와 음서 및 군사 출신이 망라되었다. 한편 무반직의 관직 지위는 그 소속 관서의 기능과 격, 대우, 근무지 등에 따라 결정되었다. 경직이 외직보다 우월하였고, 경직 중에서는 직계아문의 관직이 육조 속아문의 관직보다 지위가 높았다. 또 정직이 체아직보다 우월하였는데, 체아직 중에서는 내금위·겸사복이 여타의 관직보다 우월하였다.
중앙의 오위를 비롯한 각종 군사를 지휘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등의 장관과 차관에 해당하는 정2품 및 종2품직은 대개 문반의 겸직이었다. 또 지방의 모든 군사도 관찰사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및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면서, 군사도(軍事道)의 군사를 총관한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지휘하였다. 무반 중에서도 오위도총부의 도총관과 부총관은 왕의 신임을 받는 자가 제수되어 1년마다 교체되었고, 당하관인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도 행정 실무와 군무에 익숙한 자가 제수되었다. 또 훈련원(訓鍊院) 정(正)은 근무 기간이 차면 당상관으로 승진하였고, 내금위는 체아직이기는 하나 문반의 집현전에 비견되면서 시험을 거치지 않고 첨절제사(僉節制使)·만호 및 변방의 수령에 제수되었기에 모든 군직자가 선망하는 관직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무반직은 크게 그 근무지에 따라 경직과 외직으로 구분되고, 경직은 다시 직질(職秩)에 따라 당상직·당하직·참상직·참하직으로, 상근 여부에 따라 정직·겸직으로, 녹봉 지급 여부에 따라 녹직·무록직으로, 소속 관서의 지위에 따라 직계아문직·육조속아문직으로, 직사(職司) 여부에 따라 정무직(政務職)·예우직(禮遇職) 등으로 구분되었다. 여기서 당상직은 정1품∼정3품 상(上)의 관직을, 당하직은 정3품∼종4품의 관직을, 참상직과 참하직은 각각 정5품∼종6품, 정7품∼종9품의 관직을 가리킨다. 또 직계아문직은 직계아문인 정1품∼정3품 당상아문에 속한 관직을, 육조속아문직은 육조에 속한 정3품∼종6품 아문에 소속된 관직을 말한다. 정무직에는 의정부와 육조 등의 관직이, 예우직에는 종친부(宗親府)·의빈부·돈녕부(敦寧府)·중추부(中樞院) 등의 관직이 속하였다. 녹직은 다시 1년 내내 근무하며 4번 녹봉을 받는 정직과, 근무 기간에만 녹봉을 받는 체아직으로 나뉘었다. 경직 문반직의 대부분이 과전을 지급받고 1년에 4번 녹봉을 받는 정직인 데 비해, 무반직의 경우 문반직과 같은 대우를 받은 관직은 4,000여 직 중 800여 직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3,200여 직은 대부분 오위에 소속된 체아직으로, 과전을 지급받지 못하였으며 근무 기간에만 녹봉을 받았다.
경외의 무반에는 무과 및 음서를 통해 출사하거나 각종 복무를 거쳐 관직에 진출한 군사 출신 등이 포괄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관계(官階)를 바탕으로 제수되었는데, 무반직은 무산계를 토대로 하였다. 무반 가운데 중추부(中樞府)·오위도총부·훈련원·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 등에 속한 관원은 문반과 마찬가지로, 고과(考課)·포폄법(褒貶法)에 근거한 정기 인사인 도목정(都目政)과 임시 인사인 전동정(轉動政)을 비롯한 문과·공로·특지 등을 통해 승직·강직·파직되었다. 갑사를 포함한 각종 군직은 근무 일수에 따라 가계(加階)되었다.
오위도총부·훈련원에 속한 경외 관원의 경우, 당상관은 정해진 임기 없이 당상관의 승진 순서인 좌목(座目)과 왕의 특별 명령인 특지(特旨)에 의해 승진하였다. 당하관 이하 경관의 경우 참상관 이상은 900일의 근무 기간을 채우고 근무 평가가 5고(考) 3상(上)인 사람이, 참하관은 450일의 임기를 채우고 3고 2상의 평가를 받은 사람이 가자(加資)되면서 체직되었다. 그 외에는 같은 품계의 관직으로 체직[平遷]되었으며, 10고 2중인 경우에는 무록관으로 체직되었고, 10고 3중 또는 5고 2중인 관원은 파직되었다. 당상 수령은 5고 1중이면 파직되었다. 외관은 경관과 마찬가지로 가자되었으나 임기는 달랐는데, 관찰사와 도사의 경우 360일, 수령의 경우 1,800일이었다. 다만 당상 수령이나 가족 없이 부임한 수령은 임기가 900일이었다. 각종 군사는 표 1과 같이, 충찬위(忠贊衛)의 경우 39일, 팽배(彭排)·대졸(隊卒)의 경우 1,080일의 근무 기간을 채우면 1계가 가자되었다.
무반은 문반과 더불어 양반으로 불렸으며, 법제적으로 문반과 병립하면서 경외의 군사를 지휘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외적을 방어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학의 숭상 및 문반이 중심이 된 군정 운영에 따라 문반이 무반을 압도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정책을 입안하고 군사·국방을 제외한 모든 행정을 결정·집행하였다. 종2품 이상의 관직은 모두 문반이 겸대하였고, 군직의 대부분이 소속된 오위의 무반은 오위가 병조의 속아문이었으므로 병조의 통제를 받았다. 또 오위의 무반직 중 정직은 400여 직에 불과하고, 대부분인 3,200여 직은 근무 기간에만 녹봉을 받는 체아직이었다. 그에 따라 오위도총부 도총관·부총관, 내금위·겸사복·오위 장을 겸대한 문반이 정3품 상호군(上護軍) 이하의 군사를 총관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금위·겸사복·오위의 상호군 이하는 각각 장관의 지휘를 받아 소속 군사를 지휘하고 군사 임무를 수행하였다. 외직의 경우에도 전임(專任)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는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를 겸한 관찰사의 통제 아래 수하에 있는 절제사(節制使) 이하 무반을 지휘하면서 군사를 총관하였다. 또 절제사·첨절제사·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절제도위(節制都尉)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관내의 군사를 지휘하고 백성을 통치하였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병마절제사·병마첨절제사·병마절제도위는 문반 수령이 겸대하였다.
무반직의 지위는 대개 해당 관서의 기능 및 직무, 인사 규정, 신분 등에 따라 정해졌다. 그 결과 경직 무반직이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변진의 수령이 위속(衛屬) 군직보다 우월하였고, 위속 군직 중에서는 내금위·겸사복이 가장 지위가 높았으며,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가 그다음이며, 파진군(破陣軍)·팽배·대졸이 가장 열등하였다. 그중 내금위와 겸사복은 문반의 집현전에 비교될 뿐 아니라 곧바로 첨절제사·만호 및 변읍의 수령에 제수될 수 있었다. 따라서 무예가 출중한 자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되었고, 군사들이 선망하는 관직이 되었다. 또 조선후기에는 중앙군의 주축이 된 오군영이 노론에 의해 설치 및 운영되면서, 당쟁기와 세도정치기에 노론과 외척이 장기간 정권을 주도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무반직은 1392년(태조 1)의 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중앙에 정3품 십위(十衛) 상장군(上將軍) 각 1직 이하 종9품 10위·도부외(都府外) 별장(別將) 306직 등 4,400여 경직과 20여 외직을 두면서 성립되었다. 이후 1405년(태종 5)에 문반아문이던 훈련원이 무반아문이 됨에 따라 그 소속 관직이 무반직이 되었고, 이어 1430년(세종 12)에 무임소 문·무 당상관과 종친·외척의 예우 기관으로 성립된 중추원·종친부·돈녕부가 무반아문으로 편입됨에 따라 그에 속한 관직도 무반직이 되었다. 그 뒤 1436년(세종 18)에는 이전까지 정1품~종8품까지로 편성된 무산계에 정9품 진무부위와 종9품 진의부위가 설치되어, 문산계와 대등한 구조를 갖추면서 정9품·종9품 무반직의 제수를 뒷받침하였다. 또 1466년(세조 12)까지 오위에 소속된 갑사 등의 정직 중 소수의 정품직만이 잔류되고 대부분인 종품직이 체아직으로 전환되었다. 1485년(성종 16) 이전에 종친부·돈녕부가 다시 문반아문이 됨에 따라 그 소속 관직이 문반으로 이속되었다. 이처럼 무반직은 1485년(성종 16)까지 중추부 이하의 무반아문, 영중추부사 이하의 정직과 오위 상호군 이하의 체아직 체제가 정착되면서 문반직과 병립된 관직으로 정립되었다. 또 경외의 무반직은 1485년까지 관서의 설치·혁파·통합, 경비 절감, 관서의 승강, 국방 강화 등과 관련되어 신치·삭감·혁거되었다. 그에 따라 경직은 정1품 영중추부사 1직 이하 830여 정직과 정3품 선전관·겸사복·내금위 각 1직 이하 4,600여 체아직, 오위도총부 도총관·부총관 10직 이하 34겸직으로 조정되었다. 외직은 종2품 병마절도사 7직 이하 110여 정직, 병마절도사 8직 이하 390여 겸직으로 정비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외직은 그 뒤 변란 극복, 오군영의 설치와 군영아문의 증설, 변진 증치 등과 관련되어 관직이 신치·혁거되고 체아직이 대대적으로 삭감되면서,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는 110여 정직과 390여 겸직으로,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210여 정직과 450여 겸직으로 조정되었다. 이후 다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간행된 1865년(고종 2)까지 220여 정직과 460여 겸직으로 조정되어, 큰 변동 없이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수반된 근대식 관제 개혁 때까지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무반직의 중심인 경관 정직은 표 2와 같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민현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 일조각, 1980.
- 최효식, 『조선후기 군제사연구』, 신서원, 1995.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이재룡, 「조선초기 체아직에 대한 고찰 - 서반체아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35·36, 1967.
- 한충희, 「조선초기 관직구조연구」, 『대구사학』 75, 2004.
- 한충희, 「조선초기 도제와 군현제 정비연구」, 『계명사학』 1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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