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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9 기준 최신판



군사 업무와 관계된 직역 또는 직역 가운데 관직을 제외한 모든 국역.

개설

군역은 대표적인 직역(職役)으로서 좁게는 군사 업무와 관련된 직역 부담을 의미하고, 넓게는 직역 그 자체를 가리켰다. 직역이란 개개인이 국가에 대해 공공 업무를 수행하는 의무 사항, 즉 국역(國役)을 말하였다.

군역은 양천(良賤) 신분 가운데 양인에게 그리고 15세에서 59세, 혹은 16세에서 60세의 남성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군역에는 직접 병사나 정역자(定役者)로 징발되어 일정 기간 번(番)을 서거나 노동력 봉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흔히 정군(正軍)이라 하였다. 반면에 정군을 대신해서 정군 호(戶)의 경제를 보조하는 봉족(奉足)이 정군에게 부여되었다. 15~16세기에 봉족은 정군이나 정군이 속한 국가기관에 포(布)나 쌀·화폐 등을 바치는 보인(保人)으로 변하여 갔다. 일반적으로 군역은 정군만이 아니라 이 봉족이나 보인의 역(役)을 포함하였다.

내용 및 특징

군역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사·재정제도에 기초하여 성립되었다. 전근대사회의 최대 산업은 농업이며 일반인들은 주로 농민으로 존재하였다. 왕조는 통치 영역의 경계 지역에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한편, 왕조의 수도를 경비하고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에도 군사 체제의 일환으로 농민을 징발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군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도 농민에게서 징수하였다. 왕조의 군사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과 이를 운용하기 위한 군사 재원의 징수 체제를 군역이라 할 수 있다.

고려의 군사제도에서 군병(軍兵)은 부병(府兵)과 직업군인이 있었다. 부병은 지방에서 일정 기간마다 교대로 근무지에 번상(番上)하여 주로 중앙에서 복무하는 병농일치의 군인이었다. 반면 직업군인은 전문 군인 집단인 군반씨족(軍班氏族)에서 선발되는 군인이었다. 어느 쪽이든 군병에게는 군인전(軍人田)이 지급되어 해당 토지에서 생산된 곡식에 대해 징수권을 발휘할 수 있었다. 토지 생산물에 대한 징수권을 수조권(受租權)이라고도 하는데, 군병으로 징발되는 대신에 자신의 군사 업무 수행 경비와 가족의 경제생활을 이것으로 충당하였다.

그런데 조선왕조 건국 후, 직역에 따른 토지 징수권이 점차 부정되어 가는 과정에서 군역전(軍役田)의 지급이 사라졌다. 군역을 비롯한 직역이 어떠한 대가의 지급 없이 단지 국가의 공공 업무를 완수하기 위한 의무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왕조는 양인(良人)과 노비(奴婢)로 신분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에 기초하여 모든 양인 남정(男丁)에게 군역과 직역을 부과하는 원칙을 적용하였다. 관료 선발 시험인 과거(過擧)의 응시 조건과 마찬가지로 모든 양인에게 국가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공평하게 부여되는 통치 이념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통치 이념하에 병농일치의 군역 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재정비해 갔다. 군역은 왕조의 최대 생산기반인 전세(田稅)와 지역의 토산물 납부제도인 공납(貢納)과 함께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주요 재원의 하나로 존속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건국에 공로가 있는 일가들의 사병을 모두 해체하여 중앙의 삼군부(三軍府)에 귀속시키고, 오위제(五衛制)를 법제화하였다. 이 오위제는 무과(武科)에 의해 선발된 자들과 신분상의 특수 군병, 징병된 정병(正兵)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지방군에는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이 있었다(『태조실록』 1년 9월 21일). 세조 때 전국적으로 진관 체제(鎭管體制)가 확립되면서 지방군은 군역자인 정병으로 일원화되었다.

이들 정군에게는 그들의 경제적 뒷받침을 맡을 봉족(奉足)이 주어졌다. 병종(兵種)에 따라 정군 하나에 봉족 몇을 일정하게 배정하여 하나의 군호(軍戶)를 형성하였다. 봉족제도는 세조 때 호적 개정 사업과 호패제도 강화에 힘입어 1464년(세조 10)의 보법 체제(保法體制)로 전환되었다(『세조실록』 10년 2월 14일). 갑사(甲士)와 기병(騎兵)·정병(正兵) 등은 몇 명의 보인을 배당받아 정군으로 군역을 지고, 보인은 이들에게 면포를 지급하여 그들의 군역 의무를 경제적으로 보조하였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군역의 복무를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하고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립(代立)이 발생하였다. 지방의 정병도 스스로의 대역(代役)을 찾았으며, 지방관도 군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 행위를 허용해 나갔다. 임진왜란 후에는 실역(實役)을 지지 않는 대가로 1년에 2필씩의 군포(軍布)를 냈다. 병조(兵曹)는 이를 주관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실역이든 보인이든 군역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단순한 도망만이 아니라 승려가 된다든지 세력자의 그늘에서 노비[私奴]가 되어 합법적으로 군역에서 제외되는 방법도 유행하였다.

일본 및 청국과의 전쟁을 겪은 17세기에는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군역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새롭게 제기되었다.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같은 전문 군인을 양성하는 기관을 설치하여 예산을 투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기존의 국가기관들에 대해서도 자체적인 군역 징발과 재원 확보 활동을 통제하였다.

당시의 군안(軍案)에는 실제로 군역을 부담하는 자들만 기록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중앙의 관서와 군문(軍門)들은 군역 부담을 낮춘 역종(役種)을 창설하여 소속자를 모집하는 등 기관마다 경쟁적으로 군역자를 확보하는 활동을 펴고 있었다. 중앙의 상급 기관은 지방군현에 군역 재원을 요구하였고 직접 군역자를 수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충당되는 자들은 군역 부담이 어려운 자들이 대부분이어서 군안에 기록된 즉시 도망가기 일쑤였다. 또한 관의 강압으로 이미 군역을 지고 있던 자를 또다시 다른 군역에 채워 넣는 일신양역(一身兩役)의 사태도 벌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소속별·역종별 군액의 수를 정하고 그것을 넘는 개별적인 군역자 모집을 사모속(私募屬)으로 규정하여 군액의 확대를 억제하였다. 군안을 실제 군역을 부담할 능력이 있는 자들로만 채우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적인 군역자의 충당을 위해서는 그 대상자인 많은 수의 양정(良丁)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숙종 때에 중앙정부는 호적을 작성하여 인민을 더욱 세밀히 파악하였고, 「양정사핵절목(良丁査覈節目)」을 반포하여 가능한 한 양역에 충당할 많은 양정을 찾아 모으기 위해 노력하였다. 「양정사핵절목」에서는 11세가 넘으면 군역을 담당하게 하고 5~10세의 어린이도 미리 파악해 둘 것을 명하였다(『숙종실록』 2년 6월 15일).

그러나 많은 수의 양정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군역자가 소속된 각급 국가기관의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군역자 확보 활동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중앙정부는 사망, 노제(老除), 도망 등으로 빠진 군역자를 대신하여 새로운 군역자로 충당하는 대정(代定)의 업무를, 지방 말단 행정 단위의 연대 책임에 두는 이정법(里定法)을 제안하였다. 동시에, 각급 국가기관마다 군역 역종별로 정원을 재확인하여 군액을 고정하거나 억제하는 군역정책을 실시하였다. 이것이 17세기 말부터 중앙의 각종 관서와 군문(軍門)에서부터 시작된 군역을 정액화하는 사업이다.

정액 사업은 설립 초기의 정원을 재확인하는 원칙에 따라 소속별·역종별로 군액을 고정시키고 군액 외의 사모속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정해진 군액에 실제의 건실한 장정을 넣게 하고 모자라는 곳이 생기면 소속 기관이 직접 대정에 나서지 말고 도(道)와 지방 본관(本官)이 개입하게 하였다. 정액 사업은 중앙관서와 군문의 군역 역종부터 시작하여 1730년대에는 지방에 있는 감영과 병영·수영· 통영 등의 각종 군영에 소속된 군역 역종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는 1740년대의 『양역실총(良役實摠)』으로 공표되었다(『영조실록』 19년 7월 5일).

군역을 정액화하는 사업은 군포 부담을 줄이고 또 균일화하려는 노력 속에서 진행되었다. 중앙의 관서와 군문, 그리고 지방에 소재하는 감영과 군영에 소속된 양인 군보(軍保)는 모두 연간 1필의 면(綿)·포(布)나 그에 해당하는 미곡(米穀), 동전을 소속 기관에 납부하면 되었다. 군포 부담이 줄어들면서 부족해진 군역 재원은 선무군관(選武軍官)을 비롯한 군관류의 역종을 신설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는 양인에게 임명해 주면서 그들에게 군포를 징수하여 채웠다. 또한 결작(結作)·결전(結錢)이라 하여 기존의 토지세에 부가 징수하는 재원과 어염선세(魚鹽船稅) 등의 재원으로 채웠다. 특히 토지에 부가된 결전은 균역청(均役廳)을 신설하여 그곳에서 일괄적으로 징수하고 각급 국가기관에 배분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1750년(영조 26)의 균역법으로 실현되었다. 각종 세금의 지세(地稅)화와 신설된 중앙 재무 기구의 일원적인 재정 운영은 재정의 중앙 집권화를 의미하였다.

『양역실총』은 국가 기관별·역종별로 군액을 고정해 놓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보다 군역자가 거주하는 군현 단위로 고정된 군역 액수를 공표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상급 기관이 하급 기관인 지방관청에 군역자의 충당을 강제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군역의 정액화는 각급 국가기관이 개별·분산적으로 장악하던 군역자 확보 활동을 통제하고 각 기관에 분배된 군역 재원의 액수를 파악하게 하였다. 이로써 군역 재원에 대한 중앙 집권적인 운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군역의 정액화는 또한 군현마다 역종별 군액을 확정하여 지방군현의 독자적인 군역 운영을 가능하게 하였다. 지방관청은 관할 행정구역 내에 존재하는 군역 대상자를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상급 기관에서 정한 군액에 따라 군역 재원을 납부하기만 하면 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상납할 군역 재원과 그 나머지의 인적 재원에 대하여 군현의 군역 운영이 총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양역실총』이 간행된 뒤에도 군역 정액화 사업은 지방에 있는 감영과 군영의 지방군으로 확대되었고, 지방군현의 인적 재원인 읍소속(邑所屬)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었다.

19세기에 재정 운영을 둘러싸고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삼정(三政)에 대한 문란상(紊亂象)이 지방 통치의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그 가운데 군정의 폐단은 주로 지방군현의 군역 운영이 수령·향리·장교 등 군역 사무 담당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시행되는 데에 있었다. 지방의 자율적인 군역 운영이 통제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서 그것이 자의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군역은 모든 세금이 지세(地稅)와 호세(戶稅)로 통일되고 신식 군대가 창설되는 대한제국기에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김용섭, 「조선 후기 군역제 이정의 추이와 호포법」, 『성곡논총』 13, 1982.
  • 손병규, 「18세기 양역 정책과 지방의 군역 운영」, 『군사』 39, 1999
  • 송양섭, 「19세기 양역수취법의 변화: 동포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89, 1995.
  • 윤용출, 「임진왜란 시기 군역제의 동요와 개편」, 『부대사학』 13, 1989.
  • 정연식,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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