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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1 기준 최신판



조선 태종대 11개 불교 종파 중 하나로, 유식(唯識) 사상을 근거로 한 교종 종파.

개설

자은종(慈恩宗)은 법상종(法相宗)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유식 교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법상종으로 발전하여 화엄종과 더불어 양대 교종 종파로 자리 잡았다. 자은종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말기인 14세기 초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조선시대 초기까지 존속하였다. 태종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국가에서 공인한 11개와 7개의 불교 종파에 각각 속하였으며, 세종대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 가운데 교종으로 통합되었다.

설립 배경 및 연원

고려시대에는 주로 법상종으로 불렸다. 법상종은 중관(中觀)과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사상 조류인 유식에 근거한 교종 종파로, 미륵신앙을 중시하였다. 중국의 법상종은 당나라의 현장(玄奘)이 17년간 인도에 유학한 뒤 기존에 전래된 유식과는 다른 새로운 유식을 들여오면서 종파로 성립되었다. 자은종이라는 명칭은 현장의 수제자인 규기(窺基)가 자은사(慈恩寺)에 주석(駐錫)한 데서 비롯되었다. 현장의 또 다른 주요 제자인 신라 출신 원측(圓測)은 서명사(西明寺)에 주석하였고, 그의 학맥을 이은 서명학파는 규기 계통과 학문적인 경쟁 관계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에 새로운 유식이 전래되면서 태현(太賢), 도륜(道倫) 등이 다수의 관련 저술을 찬술하는 등 유식학은 화엄학과 더불어 신라 교학의 양대 주류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도 유식학의 전통은 유가업(瑜伽業) 또는 유가종(瑜伽宗)으로 계승되었고, 이후 법상종으로 발전하면서 화엄종과 함께 교종의 양대 종파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법상종은 목종의 원찰(願刹)로 숭교사(崇敎寺)가 지정되고 현종이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하면서, 왕실의 후원 아래 중앙 교단으로서의 확고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소현(韶顯) 이후에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인주이씨(仁州李氏)의 지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무신 집권기를 거치며 중앙의 교종 세력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면서, 법상종 또한 교세가 현저히 약화되었다.

한편 고려시대 전기에는 교종과 선종을 아울러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 불렀고, 후기에는 오교양종(五敎兩宗)이라 하였다. 교종은 계율(戒律)·법상(法相)·법성(法性)·원융(圓融)·열반(涅槃)을 오교로 보는데 여기에는 이견도 있다. 법상종은 교종의 오교 가운데 하나였는데, 고려시대 말기인 14세기 초에 자은종이라 불리기 시작했으며, 이는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계속되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 정책이 가시화되면서 불교 종파가 축소되었다. 태종대인 1406년(태종 6)에는 11개 종파의 242개 사찰을 공인하고 해당 사찰의 보유 토지와 노비의 수를 정하였으며, 이들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 사찰의 수조지(收租地)로서의 사사전(寺社田)사사노비(寺社奴婢)속공(屬公)하였다. 자은종에 속한 사찰 가운데 이때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것은 모두 36개 사찰이었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이듬해인 1407년(태종 7)에는 기존의 11개 종파를 7개로 축소하였다. 7개 종파는 조계종·천태종·화엄종·자은종·중신종(中神宗)·총남종(摠南宗)·시흥종(始興宗) 등이다. 그와 더불어 앞서 지정한 242개의 사찰 가운데 고려시대부터 중시되어 온 자복사(資福寺) 88개를 산중의 명찰(名刹)로 대체하였다. 자은종의 경우 36개 사찰이 공인을 받았는데, 승령관음사(觀音寺), 양주신혈사(神穴寺), 개령사자사(獅子寺), 양근백암사(白巖寺), 남포성주사(聖住寺), 임주보광사(普光寺), 의령웅인사(熊仁寺), 하동양경사(陽景寺), 능성공림사(公林寺), 봉주성불사(成佛寺), 여흥신이사(神異寺), 김해감로사(甘露寺), 선주원흥사(原興寺), 함양엄천사(嚴川寺), 수원창성사(彰聖寺), 진주법륜사(法輪寺), 광주(光州)진국사(鎭國寺) 등 17개 사찰이 새로 지정되었다.

이후 세종대인 1424년(세종 6)에는 7개 종파를 다시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폐합하였는데, 자은종은 화엄종·중신종·시흥종과 함께 교종에 편입되었다. 이때 승려의 인사 문제와 불교 교단 관리를 맡아보던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를 각각 서울의 흥천사(興天寺)흥덕사(興德寺)에 설치하였다. 그 당시 선종과 교종은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만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았다.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총 3,750명이었으며, 사전(寺田)은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로 합계 7,900여 결의 소유를 인정받았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로써 유구한 교학 전통을 지닌 자은종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
  •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 김갑주, 『조선시대사원경제연구』, 동화출판, 1983.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여」, 『진단학보』8, 1937.
  • 김영태, 「오교구산에 대하여」, 『불교학보』16, 1979.
  • 김용태,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전개와 사원경제의 변화상」,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 忽滑谷快天, 『朝鮮禪敎史』, 春秋社,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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