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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성 외곽과 국경, 섬 등의 요충지에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설치한 종2품 군영.

개설

1592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1년(선조 34) 일본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호남과 호서의 일본군을 견제하면서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수원부에 방어영을 설치하였다. 이를 계기로 방어영 설치가 확대되어 영조대 『속대전』에 육군 방어영 7개와 수군 방어영 3개가 확인된다.

방어영의 최고 지휘관은 종2품 방어사 휘하에 중군, 별장, 속오군, 아병(牙兵), 별효사(別驍士) 등이 소속되었다. 경기도 파주방어영의 경우, 군병 2,500명과 표하군(標下軍) 684명이 편성되었다.

방어영은 국방은 물론이고, 치안도 담당하였다. 육군 방어영은 외적의 침공을 도성 외곽이나 국경 등에서 격퇴하는 역할을 하였고, 수군 방어영은 해적과 외국군의 침공을 물리치거나 도성의 입구인 강화도를 수호하는 임무 등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방어사가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한 경우의 방어영은 도적 체포 등 치안을 담당하였다.

방어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방어영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1년(선조 34)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호남과 호서의 일본군을 견제하고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도 수원부에 방어영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선조실록』34년 9월 14일).

방어영의 설립 경위와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후금(後金)이 침략했을 때를 대비하여 도성 외곽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1621년(광해군 13) 도성 북쪽 장단에, 1626년(인조 4) 유사시 왕의 피신처이며 도성의 외곽 방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남한산성에, 1637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후 남한산성 방어에 포함된 춘천에 육군 방어영이 설치되었다. 경기도와 강원도에 육군 방어영을 설치한 것은, 별도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지 않고 관찰사가 병마절도사를 겸임함으로써 비롯된 군사상의 취약점을 보완하려는 측면도 있다.

둘째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경이나 주요 침투로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1605년 북로(北虜)에 대한 관방의 요지인 함경도 길주에, 병자호란 전인 1634년 여진족의 침략 관문인 평안도 의주에, 1691년(숙종 17) 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평안도 창성과 강계에 육군 방어영이 설치되었다. 아울러 청이 다시 침공하는 것을 대비하여 1642년(인조 20) 정묘호란에서 청의 주요 침입로로서 가도와 신미도와 연결되는 평안도 선천에, 1686년(숙종 12) 대동강 근처의 중요한 조운로로서 내륙 침투의 길목인 평안도 삼화에 수군 방어영이 설치되었다. 평안도에 수군 방어영을 설치한 것은 평안도에 수군절도사가 파견되지 않았던 군사상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측면도 있다.

셋째로 바다로 침투하는 해적과 외국군을 막는 데 중요한 지역에서 바다를 방어하거나 도성의 입구인 강화도를 수호하는 목적으로 수군 방어영이 설치되었다. 1690년 강화도 남부 바다와 연해를 방어하기 위해 강화도 배후지인 영종도에, 1713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서 위급한 일이 발생해도 즉각적으로 육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제주(『숙종실록』39년 6월 2일)에 설치된 수군 방어영이 그것이다. 아울러 비록 법제화되지는 못했지만 1675년 강화도 북쪽 해안에서 경강(京江)이나 강화 연해로 침입하는 적을 막으면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소강진에, 1711년 해적과 외국군의 침략으로부터 충청도 바다를 지키면서 강화도를 지원하기 위해 안흥진 등에 수군 방어영이 설치된 바 있다.

하지만 조선전기 삼포왜란과 을묘왜란 때 방어사가 파견되었던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는 육군 방어영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것은 효종대 이후 정3품 영장(營將)을 위의 삼남에 대부분 파견함으로써, 영장이 지방군의 훈련과 점검은 물론이고 토포(討捕) 등도 전담하였기 때문이다.

조직 및 역할

방어영에는 최고 지휘관인 종2품 방어사 휘하에 ‘중군, 별장, 속오군, 아병, 별무사’ 등이 소속되었다. 방어영의 조직을 파주방어영의 예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방어영의 최고 지휘관인 방어사는 종2품으로 파주목사가 겸임하였는데, 방어사는 정2품 아문인 병조는 물론이고 같은 종2품이지만 방어사에 대한 감독권을 가진 순영(巡營)에 서목(書目)을 갖추어 첩정(牒呈)을 해야 했다. 다음으로 방어영의 두 번째 지휘관인 정3품 방어사중군은 ‘대솔관(帶率官) 3명, 표하군(標下軍) 193명, 수솔(隨率) 8명’을 휘하에 두었고, 별장은 마병(馬兵)별효사(別驍士) 250명을 지휘하였다. 방어영 군졸로는 ‘속오군이 주축인 12초(2부 4사), 아병 4초(좌우국), 별효사 2초(좌우열), 난후(欄後) 1초, 치중(輜重) 1초’ 등 20초 2,500명과, ‘방어사중군표하(防禦使中軍標下) 193명, 별장표하(別將標下) 26명, 부표하(部標下) 60명(2부), 국표하(局標下) 46명(2국), 사표하(司標下) 92명(4사), 중군수솔(中軍隨率) 8명, 집사수솔(執事隨率) 9명, 별효사보인(保人) 250명’ 등 각색표하(各色標下) 684명이 소속되었다.

그런데 파주방어영의 군병 20초는 ‘고양 2초, 교하 2초, 적성 1초, 파주속오군·각군문각아문납미포군(各軍門各衙門納米布軍)·각처산직등잡색명(各處山直等雜色名) 15초’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방어영 군병을 활용하여 육군 방어영은 외적의 침공을 도성 외곽이나 국경 등에서 격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수군 방어영은 섬 등 해방요해처(海防要害處)에서 해적과 외국군의 침공을 물리치거나 도성의 입구인 강화도를 수호하는 기능 등을 수행하였다.

한편 방어사가 토포사를 겸임하는 경우, 방어영은 토포영을 겸하여 도적 체포 등 치안을 담당하였고, 토포군관 등 토포와 관련된 조직도 있었다. 실제로 경기도 ‘광주방어영은 1633년(인조 11), 장단방어영은 1665년(현종 6), 수원방어영은 1668년’에 그리고 ‘강원도 춘천방어영은 1637년에’ 방어사가 토포사를 겸하였고, 토포군관 등도 배치되었다.

경기도광주방어영에는 토포군관 1,008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비록 988명은 쌀을 납부하는 군관이었지만 그래도 20명은 남한산성 안에서 급료를 받으면서 토포에 임하는 군관이었다. 수원방어영에는 금도군관으로 불린 토포군관이 27명이 있었고, 춘천방어영이 옮겨 간 철원방어영에는 토포군관 30명이 배치되었으며, 강계방어영의 토포청에는 ‘토포행수(討捕行首) 1명, 병방(兵房) 2명, 순라장 겸임 장무관(掌務官) 6명’이 도적의 체포는 물론이고 밤에 순행하여 도적의 약탈과 화재를 예방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변천

1601년 수원부에 방어영이 설치된 이후 방어영은 설치 지역이나 수에서 변화가 있었는데, 그 내용을 『속대전』과 『대전회통』을 통해 살펴보면 아래의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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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746년(영조 22) 편찬된 『속대전』에 기재된 10개의 방어영 중에서 경기도광주와 수원은 유수부가 설치되면서 없어졌다. 반면 전라도제주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므로 위급한 일이 발생해도 육지에서 즉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어 1713년(숙종 39) 수군 방어영이 새로 설치됨으로써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에서는 방어영이 9개가 되었다.

아울러 방어사 설치 지역도 ‘개성의 관리영 설치로 경기도 장단방어영이 1764년 파주로, 강원도 춘천이 남한산성 방어에서 제외된 점과 효과적으로 도적을 체포하기 위해 춘천방어영이 1746년 철원으로, 국경 방어선을 더 북진시키기 위해 1714년 함경도 성진에서 길주로’ 이동하였다.

방어영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문헌통고(文獻通考)』
  •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
  • 강석화, 「황해도 연안방위체계」, 『한국문화』38, 2006.
  • 김우철, 「조선후기 강원도 지방군제의 변천」, 『조선시대사학보』24, 2003.
  • 서태원, 「19세기 지방군의 치안구조와 진영」, 『사학연구』65, 2002.
  • 서태원, 「조선전기 유사시 지방군의 지휘체계-중앙군사지휘관의 파견과 관련하여-」, 『사학연구』63, 2001.송기중, 「17세기 수군방어체제의 개편」, 『조선시대사학보』53, 2010.
  • 차문섭, 「조선후기 병마방어영 설치고」, 『조선시대 군사관계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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