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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8 기준 최신판



조선초기의 11개 불교 종파 중 하나로, 천태종(天台宗)의 한 분파.

개설

소자종이라는 명칭은 조선 태종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고려시대 말기에 천태종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법사종(法事宗)도 마찬가지인데, 두 종파의 교리나 특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소자종은 원래의 천태종, 법사종은 요세(了世)가 주도한 백련사(白蓮社) 계통이라는 주장이 있다. 소자종은 1407년(태종 7)에 기존의 11개 종파를 7개로 축소, 통합할 때 법사종과 함께 천태종으로 합쳐졌다. 그 뒤 세종대에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가 성립되면서 천태종은 조계종 등과 함께 선종에 편제되었다.

내용 및 변천

고려전기에는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들을 아울러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 하였다. 오교는 대체로 교종에 해당하는 계율(戒律)·법상(法相)·법성(法性)·원융(圓融)·열반(涅槃)을, 구산은 선종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가리킨다. 고려후기에는 기존의 선종이 조계종(曹溪宗)으로 불리고, 대각(大覺) 국사(國師) 의천(義天)에 의해 1097년(고려 숙종 2)에 천태종이 선종의 한 종파로 창설됨에 따라 오교양종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연간에 억불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오교양종의 혁파가 논의되었다. 그 결과 소수의 사찰만을 공인하고 해당 사찰의 보유 토지와 노비의 수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공인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 사찰의 수조(收租) 사사전(寺社田)사사노비(寺社奴婢)속공(屬公)하였다. 그에 따라 1406년(태종 6)에 공인된 불교 종파는 소자종과 법사종을 비롯해, 조계종·총지종(摠持宗)·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 등 총 11개였다. 이들 종파에 속한 242개 사찰이 국가의 공인을 받았는데, 소자종과 법사종에는 도합 43개의 사찰이 배정되었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이어 1407년(태종 7)에는 11개 종파를 다시 7개로 축소, 통합하였다.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은 천태종으로 합쳐졌고, 중도종과 신인종은 중신종(中神宗)이 되었으며 도문종은 화엄종에 포함되었다. 총지종과 남산종은 총남종(摠南宗)으로 통합되었고 조계종, 자은종, 시흥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때 고려 이래의 자복사(資福寺) 88개 대신 명찰(名刹)을 새로 지정하여 대체하였는데, 천태종은 충주(忠州) 엄정사(嚴正寺), 초계(草溪) 백암사(白巖寺), 태산(泰山) 흥룡사(興龍寺), 정산(定山) 계봉사(鷄鳳寺), 영평(永平)백운사(白雲寺),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 영해(寧海) 우장사(雨長寺), 대구(大丘) 용천사(龍泉寺), 도강(道康) 무위사(無爲寺), 운봉(雲峰) 원수사(原水寺), 대흥(大興) 송림사(松林寺), 문화(文化) 구업사(區業寺), 김산(金山) 진흥사(眞興寺), 무안(務安) 대굴사(大崛寺), 장사(長沙) 선운사(禪雲寺), 제주(堤州) 장락사(長樂寺), 용구(龍駒) 서봉사(瑞峰寺)의 17개 사찰이 새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이후 세종대인 1424년(세종 6)에 기존의 종파들을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였는데 천태종은 조계종, 총남종과 함께 선종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여」, 『진단학보』8, 1937.
  • 김용태,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전개와 사원경제의 변화상」,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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