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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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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섬거역 |
한글표제 | 섬거역 |
한자표제 | 蟾居驛 |
상위어 | 오수도(獒樹道) |
관련어 | 속역(屬驛), 마호주(馬戶主),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역보(驛保), 솔정(率丁), 일수(日守), 공수위(公須位), 마위답(馬位畓), 광양현(光陽縣)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이승민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1)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섬거역(蟾居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8년 8월 5일, 『태종실록』 8년 10월 26일 |
조선시대 전라도의 도로망인 오수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는데, 섬거역(蟾居驛)은 이때 승나주도(昇羅州道) 광양(光陽)에 위치해 있던 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정립된 44역도-537속역 체제에 따라 창활도(昌活道)에 속하였다. 그 뒤 세조대에 역로를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오수도(獒樹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로 확립되었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섬거역은 고려시대부터 전라도 광양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승나주도에 소속된 30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승나주도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 창활역(昌活驛)·오수역(獒樹驛) 등과 함께 전라도의 역도 중 하나인 창활도 소속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양현 편에 따르면, 섬거역에는 역마 6필과 역마를 맡아 기르는 마호주(馬戶主) 6명이 있었다. 또 역리(驛吏) 11명, 역노(驛奴) 10명, 역비(驛婢) 9명, 역보(驛保) 26명, 솔정(率丁) 13명, 일수(日守) 10명, 인호(人戶) 51호가 속해 있었다. 1798년(정조 22)에 간행된 『희양지(曦陽誌)』에 따르면 대마(大馬) 1필, 기마(騎馬) 2필, 복마(卜馬) 4필 등 총 7필의 역마와, 역리 94명, 역노 29명, 역비 9명, 보인(保人) 26명, 일수 10명, 복호(復戶) 26결, 공수위(公須位) 4결(結) 10부(負) 3속(束), 마위답(馬位畓) 18석(石) 4두락(斗落)이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1872년(고종 9)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역리 97명, 역노 29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 세종 때까지 섬거역은 창활도에 속하였다. 그 뒤 1462년(세조 8)에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찰방(察訪)과 역승(驛丞)을 두어 41역도-543속역 체제로 역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창활도가 오수도로 바뀜에 따라 오수도 소속이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섬거역은 익신역과 더불어 오수도의 본역인 오수역에 딸린 속역이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섬거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따르면 광양현 섬거포(蟾居浦) 위쪽, 현의 동쪽 40리 지점이었다. 섬진강 건너 경상도 지역과 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요지에 해당하였다. 오늘날의 위치는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섬거리이다.
섬거역은 승주와 나주를 거쳐 내륙으로 연결되는 역할을 했다. 광양만의 김, 백운산의 표고버섯, 망덕리의 뱀장어, 골약리의 굴과 백합이 이곳을 거쳐 한양으로 실려 갔다고 한다. 1940년에는 광양을 통과하는 경전 남부선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해방과 함께 중단되었는데, 1969년에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완공되면서 옛 섬거역 자리에 진상역이 설치되었다.
한편 섬거역은 조선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번 격변의 장이 되었다. 1408년(태종 8)에는 왜구가 섬거역까지 쳐들어왔고(『태종실록』 8년 10월 26일),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는 중초영장(中哨營長) 곽경환(郭景煥)이 전라좌수영에서 100명의 영병(營兵)을 인솔해서 부산에서 온 일본군 1개 중대와 합세하여 광양현의 다압(多鴨)·월포(月浦) 등지에서 동학군을 몰아내고 섬거역에 이르러 동학의 도접주 김갑이(金甲伊) 외 28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남읍지(湖南邑誌)』
- 『희양지(曦陽誌)』
- 『광양군지(光陽郡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