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도(獒樹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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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전라도 남원의 오수역을 중심으로 편성한 역도.

개설

오수도(獒樹道)는 세종대의 창활도(昌活道)를 계승한 역도(驛道)인데, 오수도로 개칭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조 이전 시기로 추정할 뿐이다. 1462년 역도를 개편하면서 오수역·창활역·동도역·응령역·인월역·지신역·잔수역·양률역·낙수역·덕양역·익신역·섬거역 등 12개 속역이 오수도에 배속되었다.

내용 및 특징

오수도는 삼례도(蔘禮道)·청엄도(靑嚴道)·제원도(濟原道)·벽사도(碧沙道)·경양도(景陽道)와 더불어 전라도 지역에 설치된 역도이다. 오수역(獒樹驛)·창활역(昌活驛)·동도역(東道驛)·응령역(應嶺驛)·인월역(引月驛)·지신역(知申驛)·잔수역(潺水驛)·양률역(良栗驛)·낙수역(洛水驛)·덕양역(德陽驛)·익신역(益申驛)·섬거역(蟾居驛) 등 12개 속역으로 편성되었으며, 세조대에는 그 중심 역인 창활역에 찰방(察訪)을 파견하였다. 남원-운봉, 남원-구례-순천-광양-하동, 순천-전라좌수영, 남원-곡성-낙안 등지로 연결되는 역로(驛路)를 관할하였는데, 오수도의 속역은 모두 소로(小路) 또는 소역(小驛)에 속하였다. 오수도는 1896년(고종 33) 1월 18일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변천

고려의 역도를 계승한 조선 왕조가 언제부터 역도를 개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종과 세종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역도를 개편하였다.

그 뒤 1457년(세조 3) 9월에 병조의 수교관문(受敎關文)에 의거하여 이조에서 올린 계(啓)에 따르면, 국도(國都) 주변의 경기 여러 역과 강원·충청도의 일부 역을 합속하여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경기충청좌우도(京畿忠淸左右道)·경기충청도(京畿忠淸道)·경기강원도(京畿江原道) 등 6개 역도로 나누어 역승(驛丞)을 폐지하고 정역찰방(程驛察訪)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역도-속역 체제의 개편 과정에서 전라도 지방의 역도는 1460년(세조 6)과 1462년(세조 8)의 개편을 통해 일부 역도가 통합되면서 완성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창활도는 오수역·잔수역·갈담역(葛潭驛)·은령역(銀嶺驛)·통도역(通道驛)·인월역·익신역·섬거역·양률역·낙수역·지신역 등 11개 속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언제 오수도로 개칭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457년에 제원도와 오수도의 모든 역과, 삼례도에 속한 고산의 옥포역(玉包驛), 영보도(永保道)에 속한 낙안의 낙승역(樂昇驛), 경양도에 소속된 순창의 창신역(昌新驛) 및 옥과의 대부역(大富驛) 등을 한 도로 합하여 오수도라고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오수도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세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1460년에는 오수도의 광리역(廣里驛)과 오림역(吾林驛)을 영보도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1462년에는 역도를 개편, 확정하면서 오수역·창활역·동도역·응령역·인월역·지신역·잔수역·양률역·낙수역·덕양역·익신역·섬거역 등 12개 속역을 오수도에 배속하였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과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살펴보면, 오수도의 속역 구성이 조선시대 후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수도의 운영 실태는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와 1895년에 편찬된 『호남역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오수도의 속역별 역리와 역마 및 마호 배속 현황을 정리한 것이 다음의 <표 1>, <표 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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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호남역지(湖南驛誌)』
  •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 유선호, 「朝鮮初期의 驛路와 直路」, 『역사교육』70,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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