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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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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계사 |
한글표제 | 계사 |
한자표제 | 計士 |
관련어 | 별례방(別例房), 별고(別庫), 별영(別營), 산원(算員), 세폐색(歲幣色), 요록색(料祿色), 은색(銀色), 응판색(應辦色), 잡물색(雜物色), 전례방(前例房), 종팔품(從八品), 주전소(鑄錢所), 판별방(版別房), 판적사(版籍司), 호조(戶曹), 회계사(會計司)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고동환 |
관품 | 종팔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계사(計士) |
조선시대 회계 업무를 담당하던 관원의 총칭 또는 회계 실무를 담당하던 종8품 관직.
개설
호조(戶曹)는 조선시대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부서였다. 재정 업무가 과다하기 때문에 호조의 업무를 판적사(版籍司), 전례방(前例房), 별례방(別例房), 판별방(版別房), 세폐색(歲幣色), 응판색(應辦色), 은색(銀色), 요록색(料祿色), 별영(別營), 별고(別庫), 잡물색(雜物色), 회계사(會計司), 주전소(鑄錢所) 등으로 나누어 업무를 담당하게 하고 정랑(正郞) 3명과 좌랑(佐郞) 3명이 맡게 하였다. 그리고 각 기관에는 계사(計士)·서리(書吏)·고직(庫直)을 두었다. 다만 회계사에는 서리와 고직을 두지 않고 계사만을 두었다. 계사는 신분상 중인(中人)이 담당하던 관직이다. 체아직(遞兒職)으로 근무 일수 514일이 차면 품계를 올려주되, 종6품이 되면 그 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산원(算員)으로 계속 근무를 원하는 자에 한해서 900일마다 품계를 올려주되 정3품에서 그치게 하였다.
담당 직무
국가 재정에 대한 회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1749년(영조 25) 선공감(繕工監)에서 성균관과 종묘, 궁궐, 각종 관청의 수리 공사를 담당하였는데 이러한 수리에 필요한 각종 목재 출납 비용 등을 감찰하는 것도 계사의 몫이었다. 또한 정조 때 『탁지지(度支志)』의 기초가 되는 호조의 법례를 만들 때도 계사가 참여하여 이를 완성하였다. 계사는 호조의 전체 운영을 가장 잘 아는 관원이기도 하였다.
변천
1466년(세조 12) 관제 개정 때 호조 소속의 정원 2명으로 설치되어 『경국대전』에 계승되었으나, 1506년(연산군 12) 1명으로 축소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속대전』에서는 정원이 1명으로 변경되어, 『대전회통』 단계까지 유지되었다. 단, 『경국대전』에는 회계 업무에 종사하는 자들을 총칭하여 산원이라 불린 듯하며 계사 역시 여기에 포함된 듯하다. 그리하여 그 정원이 30명이었다. 18세기 후반 『대전통편』에서는 정원이 56명으로 늘었으며, 19세기 초인 『만기요람』에서는 60명이 정원이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호조에 딸린 하급 관청인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사도시(司䆃寺), 사섬시(司贍寺), 군자감(軍資監), 제용감(濟用監), 사재감(司宰監), 전함사(典艦司), 사온서(司醞署), 의영고(義盈庫) 등의 회계 업무도 호조에 속한 판적사, 별례방, 전례방 등에 소속된 계사들이 담당하였다. 호조 속사의 계사는 산원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후기에는 산원들이 회계 업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계사로 통칭하였을 것이다.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계사 즉, 산원은 호조 외에 병조와 공조·선공감에도 존재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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