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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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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거모장 |
한글표제 | 거모장 |
한자표제 | 去毛匠 |
상위어 | 공장(工匠) |
동의어 | 생피장(生皮匠), 피장(皮匠) |
관련어 | 거골장(去骨匠), 백정(白丁)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인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거모장(去毛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6년 8월 1일 |
소, 돼지 등의 짐승을 도살하여 가죽을 벗기는 일을 하였던 장인.
개설
짐승을 도살하여 고기를 제공하고 가죽을 벗겨서 쓸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였는데, 고기와 뼈를 발라내는 일을 했던 거골장(去骨匠), 도살된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피장(皮匠), 생피장(生皮匠), 숙피장(熟皮匠), 사피장(斜皮匠) 등과 역할이 중첩되었다. 조선시대 백정(白丁)도 거모장과 유사한 일을 하였다. 짐승을 도살한다는 점에서 거모장(去毛匠)의 역은 천하게 여겼으며 대대로 그 일을 세습하여야만 하였다.
담당 직무
소나 돼지 등을 죽여서 가죽을 벗기는 일이 주된 임무로 서울에서는 거모장이라고 불렀으나, 지방에서는 피장이 가죽과 고기를 제공하였다. 일부 거모장은 경공장(京工匠)으로 소속되어 가죽을 다루는 일을 하였다. 그 밖에 사신의 접대나 각종 연회에 써야 할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거모장이 동원되어 도살을 하였다. 조선시대 소의 도살은 정부가 엄격하게 통제하였으나, 민간인의 의뢰로 거모장이 소를 도살하면 서울에서는 공임(工賃)을 받았고, 지방에서는 거모장이 가죽을 벗길 때 고기를 약간 붙여 벗겨서 이를 가지고 생활하였다. 또한 도살의 공임으로 소의 부속물을 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16세기 성주(星州)에서 피장이 이문건(李文楗)에게 여러 번 소의 부속물을 선물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조선후기에는 거모장이 공역을 맡으면, 그 대가로 정부에서 쌀이나 포를 받았다. 원래 거모장은 천역(賤役)으로 인식되어 공역을 했어도 양식 등 대가를 지급받지 못하였으며 도살한 짐승의 가죽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 때부터 봄과 가을에 봉상시와 사재감의 일을 맡은 거모장은 도살한 짐승의 가죽을 받았으며 이후로는 역에 응한 거모장의 경우 그 대가로 하루 두 때의 식사를 제공받거나 노임으로 매일 쌀 3되와 무명 1단 반, 조기 2마리, 감장 5홉을 받기도 하였다.
1744년(영조 20)에는 공식 잔치를 하기 위해 거모장 24명이 8일 동안 동원되었는데 그 노임으로 매일 포(布) 2자 3치 3푼을 받았다. 1784년(정조 8)에는 관청에 소속되지 않은 거모장이 도살을 못하여 살아갈 수가 없으니 관청에 소속되어 제향 때마다 사역을 하겠다고 요청한 적도 있다. 1793년(정조 17)에 거모장이 살인을 하여 진술한 내용 가운데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와 부인이 모두 양인이었다고 한 것이 있어 거모장 가운데 간혹 양인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문헌 기록으로 거모장은 조선초기에 등장하지만, 유사한 역할을 하는 피장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고려 군기감(軍器監)에 피장 2명이 갑옷, 활 등에 들어가는 가죽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때는 1460년(세조 6)에 군기감의 소속 장인의 수를 늘렸는데 거모장은 15명을 정원으로 하며 한번에 5명씩 근무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이 인원은 군기감의 다른 장인과 비교할 때 그 수가 적지 않으며 그들의 역할은 군기감에서 제작하는 활과 안장 끈 등에 들어가는 가죽을 만드는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1485년에는 군기시(軍器寺)에 거모장 대신 생피장 4명이 소속되었으며 상의원(尙衣院)에는 2명이 배속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사축서(司畜署)에서 거모장을 관리하였는데, 1767년(영조 43) 사축서사목(事目)에 의하면, 사축서에서 소를 도살하고 고기를 파는 현방(懸房)에서 활동하고 있는 거모장의 이름을 책자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사축서의 사역이 있을 때에는 불러서 일을 시키도록 하고 있다. 당시 서울의 20개 현방의 거모장들은 매 현방마다 4명씩 총 80명의 거모장을 사축서에서 필요한 역에 응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축서에서는 매년 활동하는 거모장과 사망자를 파악하여 책자로 만들고 매 3년마다 한 번씩 책자를 바꾸도록 하였다. 그러나 영조 때 거모장이 50명뿐이어서 여러 군문(軍門)에 고기를 공급을 위한 역이 과하므로 일부 거모장은 피역하여 도망을 갔다. 이를 막기 위해 거모장은 군영에 배정되기도 하였다. 거모장은 사축서가 폐지된 1894년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묵재일기(黙齋日記)』
- 강만길, 「왕조 전기 백정의 성격」,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김인호, 「소를 잡아서 먹고 살다, 거골장」, 『조선의 9급 관원들』, 너머북스, 2011.
- 송찬식, 「현방고」, 『조선후기사회경제사의연구』, 일조각, 1997.
- 이준구, 「조선전기 백정의 범죄상과 제민화시책」, 『대구사학』 56,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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