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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40 기준 최신판



성균관(成均館)향교(鄕校)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와 그 제자 및 유교 성현에게 지내는 제사.

개설

석전제는 고려 및 조선왕조가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의례로, 당시의 학교 제도 및 유학의 교육 방식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시행되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과 향교, 조선시대의 국립학교인 성균관과 향교 및 사립학교인 서원(書院) 등은 모두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 장소인 동시에 유교의 성현을 제사하는 공간이었다. 이 모든 학교에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공간과 제사를 위한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석전제를 올리는 장소인 문묘에는 유학의 발전에 기여한 성현들의 신위가 등급에 따라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석전의(釋奠儀) 정위(正位)는 공자 1위(位)이며,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의 4위가 배향위(配享位)에 해당한다. 여기에 공자의 대표적인 제자인 10철(哲)과, 송나라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소옹(邵雍)·장재(張載)·주희(朱熹) 등을 종향위(從享位)로 삼았다. 그밖에 대성전의 좌우에 별도로 지어진 동무(東廡)서무(西廡)에는 공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공문(孔門)의 72제자와 유학의 진흥에 공을 세운 중국의 역대 성현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름난 유학자 18명 등을 각각 모셨는데,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동무에는 55위가, 서무에는 54위가 있었다.

문묘에 종사(從祀)된 우리나라 유학자에는 신라시대의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 고려시대의 안향(安珦)과 정몽주(鄭夢周) 등이 있다. 조선시대 학자 가운데는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김장생(金長生)·이언적(李彦迪)·조광조(趙光祖)·김인후(金麟厚)·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조헌(趙憲)·송시열(宋時烈)·김집(金集)·박세채(朴世采)·송준길(宋浚吉) 등 14명의 신위가 모셔졌다.

우리나라 유학자의 문묘 종사는 광해군 때부터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붕당(朋黨) 간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1611년(광해군 3)에 북인인 정인홍(鄭仁弘)이 자신의 스승인 조식(曺植)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하여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며 그들의 신위를 문묘에서 빼자고 주장한 회퇴변척(晦退辨斥) 사건이나, 숙종 연간에 서인과 남인의 환국(換局) 과정에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와 출향(黜享)이 반복된 사건 등은 이를 둘러싼 붕당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가 사전(祀典)에 수록된 석전제는 왕의 시학(視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성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조선시대에, 왕이 석전제를 시행하는 날 유생들의 유학 실력을 시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은 태종대에 처음 시행된 이래 조선말기까지 이어진 전통인데, 정기적인 석전제에 왕이 참석할 때는 물론이고, 갑자기 성균관으로 행차하여 유생들을 시험할 때도 반드시 먼저 문묘에 나아가 제사를 지낸 뒤 시학을 하였다. 시학은 유생들을 시험하는 것을 말하는데, 대개 일종의 과거 즉 알성시(謁聖試)를 치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공자에 대한 제사가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유교가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천명된 한(漢)나라 때부터였다. 그러다가 오례(五禮)의 형태로 국가의 사전에 등장한 것은 당(唐)나라 때인데, 이때 석전제는 중사(中祀)에 편입되었고, 이러한 제사의 등급은 청(淸)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682년(신라 신문왕 2)에 국학(國學)이 설립되고, 717년(신라 성덕왕 16)에 당나라에서 문선왕(文宣王)과 10철, 72제자의 화상(畵像)을 들여와 태학(太學)에 두게 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석전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1061년(고려 문종 15)에 왕이 몸소 국자감에 나아가 공자에게 제사하면서, 석전제가 국가 제사로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의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편찬한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를 바탕으로 쓰인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 따르면, 석전제가 중사 등급에 편입되었다. 그 뒤 고려후기에는 성리학의 도입이 이루어지면서 석전제는 성리학의 틀 안에서 운영·발전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전제는 제도적으로 보완되었으며, 왕의 친제에 대한 의례도 마련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왕이 직접 문묘에 행차하여 석전제를 지내면서 왕의 친제의(親祭儀)가 모색되었는데, 특히 태종대 후반에 이르러 역대 중국의 의례를 바탕으로 한 석전의가 새로 제정되었다. 세종 연간에는 1429년(세종 11)부터 그 이듬해까지 집현전(集賢殿)에서 역대 중국의 석전제 제도를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태종대의 제의(祭儀)를 검증하고 의식의 세부 사항들을 수정하였다. 이때 정해진 의식은 그 뒤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조에 최종적으로 수록되었다.

『국조오례의』에는 왕이 친제한 뒤에 시학하는 의식과 세자 및 유사(有司)의 석전제 의식, 주현의 석전제 의식 등 문묘에서 행하는 다양한 의식의 제도와 절차가 수록되었다. 이러한 의식 규정은 영조대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그대로 이어졌고, 부분적인 수정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정조대의 『춘관통고(春官通考)』에도 수록됨으로써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준용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왕조실록』 등의 연대기 자료를 살펴보면, 왕의 석전제 친제는 제사에만 한정되지 않고 반드시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시험한 알성시와 결합되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국조오례의』를 비롯한 역대 예서(禮書)에 수록된 왕의 문묘 친제 의식은 제사와 시학이 결합되는 형태를 띠었다. 물론 제사의 시행 주체가 왕이 아닌 왕세자 및 신하인 경우, 시학의 절차는 따로 설정되지 않았다.

『국조오례의』 길례조에 따르면, 왕이 참석하는 문묘의 제사 의식에는 향문선왕시학의(享文宣王視學儀)와 작헌문선왕시학의(酌獻文宣王視學儀)가 있었다. 그중 전자는 정기적인 석전제의 의례를 규정한 것이고, 후자는 비정기적인 행사의 의식을 설명한 것이다. 후자의 의식 절차는, 왕의 출궁과 환궁 및 시학의 의식이 빠져 있기 때문에 비교적 간단하다. 왕의 친제의에 대비되는 의식으로는 신하가 대행하는 유사석전문선왕의(有司釋奠文宣王儀)가 있는데, 이 경우 1품관이 제관(祭官)으로 의식을 주재하였다. 여기서는 왕의 친행인 ‘향문선왕시학의’를 기준으로 내용을 살펴보겠다.

왕의 친행 의식을 규정한 향문선왕시학의에 따르면, 석전 의식의 과정은 크게 의식의 준비, 거가출궁(車駕出宮), 행례(行禮), 시학(視學), 거가환궁(車駕還宮)의 5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인 준비 과정에는 제사를 시행하기 전 5일간의 재계(齋戒)와, 3일 전부터 시행되는 왕과 제관의 위차(位次) 마련 및 제수·제기 등 관련 물품의 설치, 하루 전에 아헌관(亞獻官)이 시행하는 희생(犧牲)과 제기의 검사 등이 포함된다. 석전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인 중춘(仲春)과 중추(中秋)의 첫 정일(丁日)에 지냈는데, 제사의 대상이 많은 이유로 소 1마리, 양 1마리, 돼지 5마리 등 다른 중사에 비해 풍성한 희생이 사용되었다.

2단계인 거가출궁과 5단계인 거가환궁은 왕이 문묘에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왕의 의장과 시위 군사의 수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3단계인 행례는 제사의 본 과정으로, 신위에게 폐백을 드리는 전폐(奠幣), 제수를 올리는 궤향(饋享) 뒤, 신위를 다시 돌려보내는 송신(送神)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주목할 점은 제사의 대상을 정위(正位), 배위(配位), 종향위(從享位)로 구분하여, 각각에 별도의 제관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먼저 전폐에서는 왕이 정위인 문선왕(文宣王) 곧 공자의 신위에 세 차례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 후 폐백을 드린 다음, 부복하고 몸을 바로 한다. 그 뒤 배위의 초헌관(初獻官)이 안자·증자·자사·맹자의 4위(位)에게 차례로 왕과 같은 방식으로 폐백을 올린다. 궤향(饋享)은 신위에 술을 올리는 절차로,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의 삼헌으로 구성된다. 왕이 문선왕 신위에 초헌을 시행하면 다음으로 배위의 초헌관이 4위에게, 마지막으로 분헌관(分獻官)이 종향위에 초헌을 행한다. 초헌이 끝나면 아헌관과 종헌관(終獻官)이 정위에게 아헌과 종헌을 각각 시행하고, 이후 배위의 헌관(獻官) 및 종향위의 분헌관이 각각의 대상에게 아헌과 종헌을 행한다. 작헌이 끝나면 왕이 제사에 쓰인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과 수조(受胙)의 의식을 거행한다. 마지막으로 변두를 거두는 철변두(撤邊豆)를 행한 후 아헌관이 제사에 쓰인 폐백을 구덩이에 묻는 장면을 보는 망예(望瘞)를 시행하면 의식이 종결된다.

이러한 제례가 끝나면, 4단계인 유생들에 대한 시학이 시행된다. 왕이 자리에 앉아 먼저 시강관(侍講官) 이하에게 술을 하사하면, 시강관의 우두머리인 반수(班首)가 왕에게 술잔을 올린다. 이후 강서관(講書官)의 강서(講書)와 시강관의 논란(論難)으로 이어진다. 시학은 단순히 유생들의 학습 정도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과거 시험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이 끝나면 왕과 관원이 퇴장함으로써 의식이 종결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삼국사기(三國史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명사(明史)』
  • 『송사(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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