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中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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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중추 |
한글표제 | 중추 |
한자표제 | 中秋 |
동의어 | 가위[嘉俳], 중추절(中秋節), 한가위 |
관련어 | 가절(佳節) |
분야 | 생활·풍속/풍속/행사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삼국시대~조선시대 |
집필자 | 김자운 |
시행시기 | 음력 8월 15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중추(中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2년 8월 13일, 『태종실록』 7년 8월 15일, 『세종실록』 21년 12월 4일, 『성종실록』 21년 8월 14일, 『중종실록』 12년 8월 3일 |
음력 8월 15일에 지내는 우리 고유의 민속 명절.
개설
중추(中秋)는 초추(初秋)와 만추(晩秋)의 중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음력 8월 15일로 우리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말한다. 가위[嘉俳]·한가위·중추절(中秋節) 등이라고도 한다. 농가에서는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므로 가장 중요한 명절로 친다. 오곡백과가 익는 계절이어서 이때는 집집마다 술을 빚고 살찐 닭을 잡아 배불리 먹으며 취하도록 마시고 즐길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다만 늘 한가위 같아라.”라는 말이 생겼다. 나라에서는 독서당 선비들에게 상사(上巳)·중양(重陽) 등과 더불어 가절(佳節)로서 교외에서 놀도록 허락하였다.
연원 및 변천
단오와 중추에 묘제(墓祭)를 지내는 것은 가락국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하여 그 연원을 멀리 잡는다. 중추의 우리말인 한가위의 기원은 상고시대로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왕이 이미 6부를 정하고 절반으로 나누어 둘로 만든 다음 두 왕녀를 시켜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패를 갈라 편을 만들었다. 7월 16일부터 날마다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밤 10시경이 되도록 삼[麻] 길쌈을 하다가 8월 15일에 이르러 그 성적을 살펴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차려 사례하게 하였는데, 노래하고 춤추고 온갖 유희가 연출되니 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이때에 진 편의 여자 한 사람이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라고 하는데, 그 소리가 애절하였다. 뒷날 사람들이 이 소리를 따라 노래를 짓고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
32년(신라 유리이사금 9)의 일이다. 『구당서(舊唐書)』에 신라에서는 8월 보름에 임금이 신하들을 궁전 뜰에 모아 연회를 차리고 활을 쏘며 놀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회소곡」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 중 「동도악부(東都樂府)」를 통해 전해 온다.
왕실에서는 중추가 될 무렵에 능원(陵園)에 가서 추석제(秋夕祭)를 올렸다. 1402년(태종 2)에 상왕이 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이 있는 황해도개풍군의 제릉(齊陵)에서 추석제를 행하였다(『태종실록』 2년 8월 13일). 1407년(태종 7) 8월 15일에 왕이 세자에게 명하여 인소전(仁昭殿)에서 추석별제(秋夕別祭)를 행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7년 8월 15일).
중추는 속절(俗節)로서 이날은 사형 집행이 금지되었다. 『속형전(續刑典)』에는 중외(中外)의 장형아문(掌刑衙門)은 입춘으로부터 추분에 이르기까지와 초하루·보름 상하현(上下弦) 되는 날과 24절기와 비 오는 날과 밤이 밝지 아니한 때에는 사형을 집행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형조에서는 1439년(세종 21) 이에 추가하여 속절인 단오(端午)·중추·중양(重陽) 등에도 모두 사형을 금하도록 건의하여 답을 얻었다(『세종실록』 21년 12월 4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혼전(魂殿)에 친향(親享)하는 의식을 한식·단오·중추 등 속절에도 행하고, 산릉의 제사의식에도 중추 등 속절을 포함시켰다. 친향의(親享儀) 소주(小註)에 속절은 정조(正朝)·동지·한식·단오·중추 등이라고 하였다.
1490년(성종 21)에 왕은 추석완월연(秋夕翫月宴)을 행하도록 하였다. 행사 장소로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장악원(掌樂院) 땅이 협소하여 훈련원(訓練院)으로 옮기기를 희망하여 당상은 훈련원에서, 낭청은 장악원에서 잔치를 열었다. 당상관이 모인 곳에는 술 50병(甁), 악(樂) 1등(等)을 내려주고,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이 모인 곳은 술 30병, 악 2등을 내려 주었다(『성종실록』 21년 8월 14일).
1517년(중종 12) 왕이 추석의 연향에 관해 정원(政院)에 전교하였는데, 추석을 맞아 대비전에서 진풍정(進豊呈)을 한 뒤 백관(百官)과 명부(命婦)를 모아 잔치할 장소를 미리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중종실록』 12년 8월 3일).
절차 및 내용
중추를 맞아 각 가정에서는 모두 일찍 일어나 ‘추석빔’으로 받은 새 옷을 갈아입고 하루 전에 만든 술과 떡, 그리고 햇과일로 제사를 지낸다. 행세하는 집에서는 물론이고 일반 평민 집에서도 한식과 추석에는 꼭 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특히 추석에는 머슴이나 거지라도 모두 돌아가신 부모의 무덤을 돌보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날의 절식(節食)은 송편[松餠]이고, 특히 달떡이라 하여 동그랗게 빚는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농가에서는 추석날 비가 오면 이듬해 보리농사를 망친다고 하여 좋지 않게 여긴다. 달이 있는 추석날 저녁에는 달마중을 가는데 정월 보름 때와 마찬가지로 ‘망월(望月)’한다고 하며, 달을 보며 각자 소원을 빈다. 중추절에 벌어지는 세시놀이로는 강강술래·소멕이놀이·거북놀이·씨름 등이 있다. 강강술래는 주로 호남지방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다. 중부지방 농촌에서는 소멕이놀이나 거북놀이를 한다. 두 놀이 모두 농사일을 마친 농군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이듬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점필재집(佔畢齋集)』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