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의(釋奠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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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成均館)의 문묘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하는 의식.

개설

석전(釋奠)이란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인(聖人)과 현인(賢人)들인 선성선현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이다. 석(釋)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의 뜻을 지닌 글자로서 ‘베풀다’ 또는 ‘차려놓다’라는 뜻이며, 전(奠)은 추(酋)와 대(大)의 합성자로서 ‘추(酋)’는 술병에 술을 담은 뒤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으로 술을 의미하고, ‘대(大)’는 물건을 놓는 받침대를 상징한다. 따라서 석전은 술을 받들어 올린다는 의미가 된다.

『주례(周禮)』나 『예기(禮記)』 등의 경전 기록에 따르면, 석전은 본래 산천(山川)과 묘사(廟社)에서 거행하는 제사였고, 또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에게 올리는 제사를 석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자의 의식은 사라지고 학교에서 거행하는 제사 의식만을 석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석전은 ‘정제(丁祭)’ 또는 ‘상정제(上丁祭)’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석전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연원 및 변천

석전의 유래는 유학이 수입되고 국립 학교가 설립된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신라에서 648년(신라 진덕여왕 2)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 국학(國學)에서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한 점, 717년(신라 성덕왕 16)에 당나라로부터 공자·10철(十哲)·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했던 점 등은 국학에서 석전이 봉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려에서는 국학에 문묘(文廟)를 설치하고 석전을 거행했으며, 왕이 직접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酌)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1397년(태조 6) 6월 한양에 새 문묘가 조성되기 시작하여(『태조실록』 6년 6월 2일) 이듬해 완성되었다. 이후 정종대에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정종실록』 2년 2월 2일), 태종대에 한양으로 재천도한 이후에 재건되었다(『태종실록』 7년 3월 21일). 그리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가 1601년(선조 34)부터 1604년(선조 37)까지 두 차례로 나누어 복원하였다(『선조실록』 38년 2월 26일).

문묘에서의 석전은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거행되었으며, 중사(中祀)의 규정이 적용되었다. 조선의 문묘에 봉안된 신위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정비된 것을 살펴보면, 정전(正殿)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비롯한 4성(四聖)·10철과 송조(宋朝)의 6현(六賢) 등 유학(儒學)에서 성인과 철인, 현인으로 받드는 인물 21위(位)가 봉안되었고, 동무(東廡)서무(西廡)에는 우리나라의 명현(名賢) 18위와 중국의 유현(儒賢) 94위 등 모두 112위가 봉안되었다. 한편, 지방의 향교(鄕校)에서도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봄과 가을로 1년에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절차 및 내용

조선초기 국가 전례 정비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세종실록』「오례」에는 석전 의식이 네 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시학작헌문선왕의(視學酌獻文宣王儀)’는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문묘의 공자 신위에 술을 올리고,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학(視學)하는 의식이다. 시학은 국왕이 유생들의 공부 상황을 둘러보는 것을 가리키며, 때로는 이때에 알성시(謁聖試)를 베풀어 인재를 뽑기도 하였다. ‘왕세자석전문선왕의(王世子釋奠文宣王儀)’는 왕세자가 주관하여 석전을 거행하는 의식이며, ‘유사석전문선왕의(有司釋奠文宣王儀)’는 관원들이 주관하여 석전을 거행하는 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주현석전문선왕의(州縣釋奠文宣王儀)’는 각 주현에 있는 향교에서 거행하는 석전 의식이다.

이상의 석전 의식들이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새로운 의식들이 추가되고 세분화되고 명칭도 일부 조정되어 수록되었다. 『국조오례의』에 실린 석전 의식은 ‘향문선왕시학의(享文宣王視學儀)’, ‘작헌문선왕시학의(酌獻文宣王視學儀)’, ‘왕세자작헌문선왕입학의(王世子酌獻文宣王入學儀)’, ‘왕세자석전문선왕의(王世子釋奠文宣王儀)’, ‘유사석전문선왕의(有司釋奠文宣王儀)’, ‘문선왕삭망전의(文宣王朔望奠儀)’, ‘문선왕선고사유급이환안제의(文宣王先告事由及移還安祭儀)’, ‘주현석전문선왕의(州縣釋奠文宣王儀)’, ‘주현문선왕선고사유급이환안제의(州縣文宣王先告事由及移還安祭儀)’ 등이다.

『국조오례의』에서 정비된 석전 의식은 조선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계속 이어졌다. 또,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제정된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도 왕세자가 황태자, 문선왕이 문묘(文廟)로 바뀌는 등의 명칭 변화만 있을 뿐, 실제 거행되는 의식의 절차는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준수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태학지(太學志)』
  • 『대한예전(大韓禮典)』
  •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석전대제』,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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