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로(李賢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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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교리(校理)와 병조 정랑(正郞),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본관은 강흥(江興)이고, 초명은 이선로(李善老)이다. 아버지는 이광후(李光後)이다. 자식으로는 이건금(李乾金), 이건옥(李乾玉), 이건철(李乾鐵) 등이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 김종서(金宗瑞) 등과 가깝게 지냈는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의 당여(黨與)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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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교리(敎理)와 병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초명은 이선로(李善老)이다. 본관은 강흥(江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효지(李孝之) 혹은 이광후(李光後)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참형을 당하였다.
  
 
=='''세종 시대 활동'''==
 
=='''세종 시대 활동'''==
  
이현로는 1438년(세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교리가 되었다. 1447년(세종 29)에 집현전 교리로서 사왕(嗣王)의 즉위식에 사용할 의복 제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병조 정랑으로 제수되었고,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했다. 평소에 풍수지리에 밝아 1448년(세종 30)에는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의 집터를 안국방동(安國坊洞)에 구해주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2016_002 『세종실록』 29년 2월 16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9029_002 『세종실록』 29년 9월 29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12014_001 『세종실록』 30년 12월 14일]) 하지만 같은 해 12월, 이현로는 환관 최읍(崔浥)으로부터 청탁을 받아 최순(崔淳)과 김자려(金自麗) 등의 자급을 임의로 더해주었다는 죄목으로 병조 좌랑(佐郞)윤배(尹培) 등과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 받았다. 그 결과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 윤배가 최순과 김자려의 근무 일수를 조작해 인사에 반영하였고, 이현로가 이 사실을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세종은 이현로를 파면하라고 지시했지만 대간(臺諫)에서는 이현로를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현로가 공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극형에 처할 수 없다며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12024_002 『세종실록』 30년 12월 24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26_002 『세종실록』 31년 1월 26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28_002 『세종실록』 31년 1월 28일]) 이 때 세종은 병조 정랑권기(權琦)에게 이현로가 과거에도 인사권을 남용했는지에 대해 조사시켰는데, 그 결과 향화인(向化人) 홍사을마(洪沙乙麿)를 사직(司直)에 임용하는 등의 죄가 드러났다. 이현로는 죄가 드러나자 자신 역시 권기에게 청탁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자수하면서 병조 소속 관원 대다수가 옥사(獄事)에 휘말리게 되었다. 하지만 병조 판사(判事)김종서 등이 중재에 나서고 권기의 무고함이 드러나면서 이현로는 고신을 삭탈당하고 순창(淳昌)으로 유배에 처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2003_001 『세종실록』 31년 2월 3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2015_001 『세종실록』 31년 2월 15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3001_001 『세종실록』 31년 3월 1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3020_001 『세종실록』 31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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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년(세종 13)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438년(세종 20)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으로 들어간 후, 1444년(세종 26)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16_001 『세종실록』 26년 2월 16일]) 풍수지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경복궁 서쪽에 저수지를 파서 영제교(永濟橋)로 물을 끌어넣고, 개천(현 청계천) 물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을 버리지 못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11019_003 『세종실록』 26년 11월 19일]) 집현전 교리(敎理)[[어효첨(魚孝瞻)]] 등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12021_001 『세종실록』 26년 12월 21일]),[『국조보감(國朝寶鑑)』],[『임하필기(林下筆記)』] 같은 해 말에는 [[사헌부(司憲府)]]에서 이현로에 대한 탄핵을 올렸는데, 세종은 그가 젊은 관리로 일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 뿐이라며 탄핵을 윤허하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12018_001 『세종실록』 26년 12월 18일])
  
그러나 이 사건의 처리와 관련하여 대간은 계속해서 이현로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반발했고, 세종은 공신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답하며 대신 유배지를 남평(南平)으로 변경했다. 유배를 가는 도중에 이현로는 낙생역(樂生驛)에서 또 다른 인사권 남용에 대한 죄를 자수했다. 그 결과 이현로를 다시 불러와 국문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으나, 세종은 유배지를 다시 사천(泗川)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후에도 대간에서는 이현로를 더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며 한동안 조정이 시끄러웠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3026_002 『세종실록』 31년 3월 26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4001_003 『세종실록』 31년 4월 1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4003_002 『세종실록』 31년 4월 3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4005_002 『세종실록』 31년 4월 5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4015_001 『세종실록』 31년 4월 15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5011_002 『세종실록』 31년 5월 11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129_002 『세종실록』 32년 윤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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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445년(세종 27)에는 경차관이 되어 평안도와 함길도를 방문하여 왕명에 따라 새 땅을 찾는 일을 수행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07002_003 『세종실록』 27년 7월 2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11002_001 『세종실록』 27년 11월 2일]) 그러나 같은 해 12월 이조와 예조의 낭청들과 함께 예조에 모여 창기를 불러 크게 연회를 즐긴 일로 인하여 삭직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712009_001 『세종실록』 27년 12월 9일]) 그러나 얼마 후 복귀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1446년(세종 28) 9월에 완성된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9029_004 『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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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년(세종 29)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때, 임금의 즉위 시 [[관복(冠服)]]과 [[상복(喪服)]]의 관례에 대해 대신들과 함께 주자의 설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2016_002 『세종실록』 29년 2월 16일]) 그 뒤 언문청에서 활동하며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9029_002 『세종실록』 29년 9월 29일]) 이듬해인 1448년(세종 30) 집이 없는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터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하기도 했으나, 환관 최읍(崔浥)의 청탁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매관죄로 탄핵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12014_001 『세종실록』 30년 12월 14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12024_002 『세종실록』 30년 12월 24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26_002 『세종실록』 31년 1월 26일]) 일에 대하여 세종은 이현로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대신들은 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계속해서 처벌을 요청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27_002 『세종실록』 31년 1월 27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28_002 『세종실록』 31년 1월 28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29_002 『세종실록』 31년 1월 29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1029_003 『세종실록』 31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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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에는 병조 정랑으로서 하번갑사(下番甲士)인 백화인(白化人) 홍사을마(洪沙乙麿)를 보고도 하지 않고 [[사직(司直)]]에 임명했다가 발각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2014_001 『세종실록』 31년 2월 14일]) 이 일로 대신들은 이현로를 참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공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참형 대신 순창(淳昌)으로의 유배로 마무리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3020_001 『세종실록』 31년 3월 20일]) 이후에도 대신들은 계속해서 그의 사형을 임금에게 주청하였지만,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3021_001 『세종실록』 31년 3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3023_002 『세종실록』 31년 3월 23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3023_003 『세종실록』 31년 3월 23일]) 그러나 대신들의 청이 계속되자 이현로는 결국 남평(南平)으로 부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3026_002 『세종실록』 31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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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유배지로 가는 도중 전 [[대부(隊副)]]이양무(李陽茂)에게 뇌물을 받고 [[대장(隊長)]]으로 승진시켜 준 여죄가 또 드러나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은 후 사천(泗川)으로의 유배가 확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4001_003 『세종실록』 31년 4월 1일]),([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4005_002 『세종실록』 31년 4월 5일]) 그러나 유배지가 확정된 후에도 사헌부에서 다시금 조사를 청하여 국문이 이루어졌고,([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4014_001 『세종실록』 31년 4월 14일]) 그 결과 그 죄가 결코 작지 않음이 드러나 또 다시 이현로에 대한 사형이 청해졌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5018_001 『세종실록』 31년 5월 18일]) 원래대로 사천으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06010_002 『세종실록』 31년 6월 10일]) 유배형에 처해졌던 이현로는 이듬해 초 사면령이 내려져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129_002 『세종실록』 32년 윤1월 29일])
  
 
=='''문종~단종 시대 활동'''==
 
=='''문종~단종 시대 활동'''==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이현로는 김종서의 추천으로 다시 조정에 복귀했다. 처음에는 부사직(副司直)으로서 풍수학 서적을 다루는 일을 맡았다가, 영릉(英陵)의 비각(碑閣)을 세운 일에 대한 보상으로 사직으로 승진하였다. 이런 가운데에도 이현로의 복직이 부당하다는 주장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1013_002 『문종실록』 1년 1월 13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1015_003 『문종실록』 1년 1월 15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7005_002 『문종실록』 1년 7월 5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10016_002 『문종실록』 1년 10월 16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203028_006 『문종실록』 2년 3월 28일]),([http://sillok.history.go.kr/id/kea_10205001_001 『문종실록』 2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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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즉위 이후 이현로는 [[사간원(司諫院)]] 등 언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뜻에 따라 복직이 되어([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3015_006 『문종실록』 1년 3월 15일]) 승문원(承文院) 교리, 부사직을 거쳐 사직, 승문원 부지사(副知事)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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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평소에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시화(詩畵)로써 교분을 두터이 하였으므로 안평대군의 가노(家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7023_002 『단종실록』 즉위년 7월 23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019_001 『단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 단종 즉위 이후에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정권 싸움에서 힘을 얻기 위해 수양대군 대신 안평대군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도록 계획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010_002 『단종실록』 즉위년 9월 10일]) 그리고 이현로가 계속해서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행태를 보이자 수양대군이 그를 잡아다가 사사로이 매질을 하는 일도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08_002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8일]) 이 일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임금에게 그를 체포해 추국할 것을 청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10_002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0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12_001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2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15_003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5일]) 계속되는 그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대간에서는 그의 고신을 거두고 다시는 관직에 등용시키지 못하게 해달라는 청을 올렸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20_001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0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24_001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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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로는 평소 수양대군의 세력결집을 막기 위해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과 친분을 쌓아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단종 즉위 직후 그에 대한 대간들의 계속되는 탄핵에 김종서와 황보 인은 “정직한 사람이라 버릴 수 없다”며 그를 비호해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27_001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7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2_002 『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2일]) 이런 가운데 이현로는 계속해서 안평대군과의 친분을 두텁게 유지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5019_006 『단종실록』 1년 5월 19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009_002 『단종실록』 1년 9월 9일]) 그러나 1453년(단종 1)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보내 참형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0_006 『단종실록』 1년 10월 10일]),[『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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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현로는 1791년(정조 15) 장릉에 배향할 충신을 선정할 때 정단(正壇)에 배식되는 충신 32인에 들어가게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2021_001 『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단종 즉위 후, 이현로는 안평대군이용과 가깝게 지내며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을 멀리 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수양대군 대신 안평대군을 사은사(謝恩使)로 보내려고 꾀하기도 했다. 당시 수양대군, 안평대군, 김종서 등이 산릉 역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산릉도감(山陵都監) 장무(掌務)였던 이현로는 안평대군에게만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이 일로 수양대군은 이현로를 불러 심하게 매질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대간에서는 다시 그를 탄핵했으나 김종서 등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이현로는 안평대군의 당여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6008_002 『단종실록』 즉위년 6월 8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010_002 『단종실록』 즉위년 9월 10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06_001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6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108_002 『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8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017_003 『단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2_002 『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2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0_006 『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정조(正祖) 때에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의 별단(別壇) 배향되며 신원이 회복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2021_002 『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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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과 일화'''==
  
=='''성품 및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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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현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이선로(이현로의 초명)의 사람됨이 경박하여 절도가 없으며,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었다. 안평대군과 사귐을 맺고 서로 더불어 유연(遊宴)하면서 시련(詩聯)을 창화(唱和)하니, 대군이 그에게 선물을 증여함이 특히 후하였다. 이선로가 혹시는 동료인 벗을 대군에게 헐뜯어 참소하고, 대군이 이를 임금에게 전달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기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7115_002 『세종실록』 26년 윤7월 15일]) “이현로는 마음이 간휼하고 말을 잘하고 행실이 경박하고 무상한 소인인데, 젊어서부터 유사의 이름을 빌어 시·부(賦)로써 안평대군에게 아부하고 아첨하였기 때문에 종실과 귀근(貴近)에게 사랑을 얻어서 드디어 이름이 당세에 알려졌다. 스스로 말하기를, ‘재주는 문무를 겸하여 장상(將相)의 그릇이다’라고 하며 감히 교만한 기운을 베풀어서 영웅호걸을 능멸하니, 사림들이 다투어 비웃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남방의 신지리요, 북도의 대장군이라[南方新地理北道大將軍]’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ea_10103015_006 『문종실록』 1년 3월 15일]) 그런데 이 같은 이현로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과 평가는 그가 세조(世祖)의 반대편에 서서 활동을 하다 그 결과 사망하였기 때문인 측면도 없지 않다.
  
이현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수지리를 잘 알고, 잡술(雜術)에도 능해, 1444년(세종 26) 도성 내에 흐르는 개울물에 오물을 집어넣지 못하게 하여 명당수(明堂水)를 맑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어효첨(魚孝瞻)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국조보감(國朝寶鑑)』] 한편 그는 성질이 경박하고 조심성이 없었으며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미워했고, 안평대군에게 아부하는 것이 마치 가노(家奴)와 같다고 전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129_002 『세종실록』 32년 윤1월 29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0_006 『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안평대군과 어울리면서 이현로는 안평대군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암시하는 꿈의 내용을 적어 보내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행선지를 속이면서 안평대군과 여흥을 즐기러 가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5019_006 『단종실록』 1년 5월 19일]),([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09009_002 『단종실록』 1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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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세종 대 생원(生員)이었던 이영서(李永瑞)가 성균관(成均館) 소속 종의 처와 간통했다가 머리카락을 잘린 일이 있었다. 후에 이조 정랑이 된 이영서는 사정(司正)민서(閔敍)와 관계 맺은 기생이 있는 곳에 들어갔다가 또 머리카락을 잘렸는데, 이현로가 이영서의 집에 가서 위로하고 놀리기를,“자네의 머리털은 꼭 부추나물이네”라고 하였다. 부추나물은 베면 다시 자라기 때문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06005_001 『세종실록』 30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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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로의 부인 백천 조씨(白川趙氏)는 조휴(趙休)의 딸이다. 자녀는 몇 명을 두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으나 실록에서는 그의 아들 3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남은 이건금(李乾金)이고, 2남은 이건옥(李乾玉)이며, 3남은 이건철(李乾鐵)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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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文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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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世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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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국조보감(國朝寶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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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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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東國正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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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訓民正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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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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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林下筆記)』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세종~단종]]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세종~단종]]

2018년 1월 24일 (수) 22:04 기준 최신판




총론

[?~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교리(敎理)와 병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초명은 이선로(李善老)이다. 본관은 강흥(江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효지(李孝之) 혹은 이광후(李光後)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참형을 당하였다.

세종 시대 활동

1431년(세종 13)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438년(세종 20)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으로 들어간 후, 1444년(세종 26)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세종실록』 26년 2월 16일) 풍수지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경복궁 서쪽에 저수지를 파서 영제교(永濟橋)로 물을 끌어넣고, 개천(현 청계천) 물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을 버리지 못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세종실록』 26년 11월 19일) 집현전 교리(敎理)어효첨(魚孝瞻) 등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세종실록』 26년 12월 21일),[『국조보감(國朝寶鑑)』],[『임하필기(林下筆記)』] 같은 해 말에는 사헌부(司憲府)에서 이현로에 대한 탄핵을 올렸는데, 세종은 그가 젊은 관리로 일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 뿐이라며 탄핵을 윤허하지 않았다.(『세종실록』 26년 12월 18일)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에는 경차관이 되어 평안도와 함길도를 방문하여 왕명에 따라 새 땅을 찾는 일을 수행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2일),(『세종실록』 27년 11월 2일) 그러나 같은 해 12월 이조와 예조의 낭청들과 함께 예조에 모여 창기를 불러 크게 연회를 즐긴 일로 인하여 삭직되었다.(『세종실록』 27년 12월 9일) 그러나 얼마 후 복귀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1446년(세종 28) 9월에 완성된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1447년(세종 29)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때, 임금의 즉위 시 관복(冠服)상복(喪服)의 관례에 대해 대신들과 함께 주자의 설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세종실록』 29년 2월 16일) 그 뒤 언문청에서 활동하며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29일) 이듬해인 1448년(세종 30) 집이 없는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터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하기도 했으나, 환관 최읍(崔浥)의 청탁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매관죄로 탄핵을 받았다.(『세종실록』 30년 12월 14일),(『세종실록』 30년 12월 24일),(『세종실록』 31년 1월 26일) 이 일에 대하여 세종은 이현로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대신들은 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계속해서 처벌을 요청하였다.(『세종실록』 31년 1월 27일),(『세종실록』 31년 1월 28일),(『세종실록』 31년 1월 29일),(『세종실록』 31년 1월 29일)

얼마 후에는 병조 정랑으로서 하번갑사(下番甲士)인 백화인(白化人) 홍사을마(洪沙乙麿)를 보고도 하지 않고 사직(司直)에 임명했다가 발각되었다.(『세종실록』 31년 2월 14일) 이 일로 대신들은 이현로를 참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공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참형 대신 순창(淳昌)으로의 유배로 마무리 되었다.(『세종실록』 31년 3월 20일) 이후에도 대신들은 계속해서 그의 사형을 임금에게 주청하였지만,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세종실록』 31년 3월 21일),(『세종실록』 31년 3월 23일),(『세종실록』 31년 3월 23일) 그러나 대신들의 청이 계속되자 이현로는 결국 남평(南平)으로 부처되었다.(『세종실록』 31년 3월 26일)

그 뒤 유배지로 가는 도중 전 대부(隊副)이양무(李陽茂)에게 뇌물을 받고 대장(隊長)으로 승진시켜 준 여죄가 또 드러나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은 후 사천(泗川)으로의 유배가 확정되었다.(『세종실록』 31년 4월 1일),(『세종실록』 31년 4월 5일) 그러나 유배지가 확정된 후에도 사헌부에서 다시금 조사를 청하여 국문이 이루어졌고,(『세종실록』 31년 4월 14일) 그 결과 그 죄가 결코 작지 않음이 드러나 또 다시 이현로에 대한 사형이 청해졌으나,(『세종실록』 31년 5월 18일) 원래대로 사천으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세종실록』 31년 6월 10일) 유배형에 처해졌던 이현로는 이듬해 초 사면령이 내려져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29일)

문종~단종 시대 활동

문종(文宗) 즉위 이후 이현로는 사간원(司諫院) 등 언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뜻에 따라 복직이 되어(『문종실록』 1년 3월 15일) 승문원(承文院) 교리, 부사직을 거쳐 사직, 승문원 부지사(副知事) 등을 지냈다.

한편 그는 평소에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시화(詩畵)로써 교분을 두터이 하였으므로 안평대군의 가노(家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7월 23일),(『단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 단종 즉위 이후에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정권 싸움에서 힘을 얻기 위해 수양대군 대신 안평대군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도록 계획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9월 10일) 그리고 이현로가 계속해서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행태를 보이자 수양대군이 그를 잡아다가 사사로이 매질을 하는 일도 있었다.(『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8일) 이 일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임금에게 그를 체포해 추국할 것을 청하였고,(『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0일),(『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2일),(『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5일) 계속되는 그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대간에서는 그의 고신을 거두고 다시는 관직에 등용시키지 못하게 해달라는 청을 올렸다.(『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0일),(『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4일)

이현로는 평소 수양대군의 세력결집을 막기 위해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과 친분을 쌓아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단종 즉위 직후 그에 대한 대간들의 계속되는 탄핵에 김종서와 황보 인은 “정직한 사람이라 버릴 수 없다”며 그를 비호해주었다.(『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27일),(『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2일) 이런 가운데 이현로는 계속해서 안평대군과의 친분을 두텁게 유지하였다.(『단종실록』 1년 5월 19일),(『단종실록』 1년 9월 9일) 그러나 1453년(단종 1)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보내 참형하였다.(『단종실록』 1년 10월 10일),[『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후 이현로는 1791년(정조 15) 장릉에 배향할 충신을 선정할 때 정단(正壇)에 배식되는 충신 32인에 들어가게 되었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성품과 일화

이현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현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이선로(이현로의 초명)의 사람됨이 경박하여 절도가 없으며,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었다. 안평대군과 사귐을 맺고 서로 더불어 유연(遊宴)하면서 시련(詩聯)을 창화(唱和)하니, 대군이 그에게 선물을 증여함이 특히 후하였다. 이선로가 혹시는 동료인 벗을 대군에게 헐뜯어 참소하고, 대군이 이를 임금에게 전달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기었다”(『세종실록』 26년 윤7월 15일) “이현로는 마음이 간휼하고 말을 잘하고 행실이 경박하고 무상한 소인인데, 젊어서부터 유사의 이름을 빌어 시·부(賦)로써 안평대군에게 아부하고 아첨하였기 때문에 종실과 귀근(貴近)에게 사랑을 얻어서 드디어 이름이 당세에 알려졌다. 스스로 말하기를, ‘재주는 문무를 겸하여 장상(將相)의 그릇이다’라고 하며 감히 교만한 기운을 베풀어서 영웅호걸을 능멸하니, 사림들이 다투어 비웃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남방의 신지리요, 북도의 대장군이라[南方新地理北道大將軍]’하였다.”(『문종실록』 1년 3월 15일) 그런데 이 같은 이현로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과 평가는 그가 세조(世祖)의 반대편에 서서 활동을 하다 그 결과 사망하였기 때문인 측면도 없지 않다.

후손

이현로의 부인 백천 조씨(白川趙氏)는 조휴(趙休)의 딸이다. 자녀는 몇 명을 두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으나 실록에서는 그의 아들 3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남은 이건금(李乾金)이고, 2남은 이건옥(李乾玉)이며, 3남은 이건철(李乾鐵)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동국정운(東國正韻)』
  • 『훈민정음(訓民正音)』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