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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신경인|한글표제=신경인|한자표제=申景禋|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무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인조|집필자=이기순|자= 자정(子精) |호=|봉작= 동성군(東城君) |시호= 충도(忠度) |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90년(선조 23) 10월 28일|사망=1643년(인조 21) 5월 30일|본관=평산(平山)|주거지=|묘소소재지= 경기도 광주(廣州)|증조부= 신상(申鏛) |조부= 신화국(申華國) |부= 신립(申砬) |모_외조=전주 최씨(全州崔氏): 최필신(崔弼臣)의 딸|형제=(형)신경진(申景禛), 신경유(申景裕)|처_장인=(첫째부인)고흥 유씨(高興柳氏) (둘째부인)전주 이씨(全州李氏): 이성길(李星吉)의 딸|자녀=(1자)신해(申垓) (1녀)이경과(李慶果)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89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10001_002 『인조실록』 인조 5년 10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801021_001 『인조실록』 인조 18년 1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6_001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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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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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시대 활동'''==
 
=='''광해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나이 26세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며,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가 되었다.[『서계집(西溪集)』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東城君申公墓表)」] 1618년(광해군 10)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형 신경진이 처음으로 동생 신경유 · 신경인 등과 시국에 대해 불평하다가 [[반정(反正)]]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가까운 친척인 [[구굉(具宏)]]과 함께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기로 정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광해군이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고, 서인(西人)을 탄압하자, 신경진이 은밀히 구굉과 손을 잡고 반정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동생 신경유 · 신경인도 합심(合心)하여 형 신경진을 도왔고, 형 신경진은 가까운 친구 김류(金瑬) · [[최명길(崔鳴吉)]] · 이귀(李貴) 등을 끌어 들여 모두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가자, 형 신경진은 그의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다가, 이를 눈치 챈 정승 박승종(朴承宗)에 의하여 효성령(曉星嶺) [[별장(別將)]]으로 쫓겨났다. 이때 형 신경진은 거사의 계획을 동생 신경인과 최명길에게 맡기고, 평안도 박천(博川) 가산진(嘉山鎭)으로 떠났다.[『광해군일기』광해군 15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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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년(광해군 7) 나이 26세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며,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가 되었다.[『서계집(西溪集)』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東城君申公墓表)」] 1618년(광해군 10)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형 신경진이 처음으로 동생 신경유 · 신경인 등과 시국에 대해 불평하다가 [[반정(反正)]]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가까운 친척인 [[구굉(具宏)]]과 함께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기로 정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광해군이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고, 서인(西人)을 탄압하자, 신경진이 은밀히 구굉과 손을 잡고 반정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동생 신경유 · 신경인도 합심(合心)하여 형 신경진을 도왔고, 형 신경진은 가까운 친구 김류(金瑬) · [[최명길(崔鳴吉)]] · 이귀(李貴) 등을 끌어 들여 모두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가자, 형 신경진은 그의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다가, 이를 눈치 챈 정승 박승종(朴承宗)에 의하여 효성령(曉星嶺) [[별장(別將)]]으로 쫓겨났다. 이때 형 신경진은 거사의 계획을 동생 신경인과 최명길에게 맡기고, 평안도 박천(博川) 가산진(嘉山鎭)으로 떠났다.[『광해군일기』광해군 15년 3월 13일]
  
이때부터 동생 신경인은 형 신경진을 대신하여 최명길과 함께 반정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평안도 박천 가산진에 있는 형 신경진과 연락하면서 형의 지시에 따라, 구굉과 그 조카 [[구인후(具仁垕)]], 이귀와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 · 이시방(李時昉) 형제, 장유(張維) · 장신(張紳) 형제, 김류와 그 아들 김경징(金慶徵), 종실 효령대군 후손 이서(李曙) 등과 비밀히 연락을 취하며 반정의 시일과 방법을 논의하였다. 마침 이서가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에 임명되자, 장단(長湍)의 군사를 동원하기로 합의하였다. 최명길은 거사할 날짜를 1623년(광해군15) 3월 12일 밤중으로 정하여, 모두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기로 약속하였다. 예정한 날 밤중에 장단 방어사이서가 장단부의 군사 7백 명을 이끌고 몰래 홍제원으로 왔고, 대장김류 등도 소수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제원으로 집결하여, 군사의 규모가 1천 4~5백여 명 정도가 되었다. 반정군은 한밤중에 술에 취해 [[창덕궁(昌德宮)]]에서 잠을 자고 있는 광해군을 급습하여, 마침내 정변에 성공하였다. 3월 13일 대장 김류가 서궁(西宮)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셔다가 복위(復位)시켰다.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인조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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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동생 신경인은 형 신경진을 대신하여 최명길과 함께 반정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평안도 박천 가산진에 있는 형 신경진과 연락하면서 형의 지시에 따라, 구굉과 그 조카 [[구인후(具仁垕)]], 이귀와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 · 이시방(李時昉) 형제, 장유(張維) · 장신(張紳) 형제, 김류와 그 아들 김경징(金慶徵), 종실 효령대군 후손 이서(李曙) 등과 비밀히 연락을 취하며 반정의 시일과 방법을 논의하였다. 마침 이서가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에 임명되자, 장단(長湍)의 군사를 동원하기로 합의하였다. 최명길은 거사할 날짜를 1623년(광해군15) 3월 12일 밤중으로 정하여, 모두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기로 약속하였다. 예정한 날 밤중에 장단 방어사이서가 장단부의 군사 7백 명을 이끌고 몰래 홍제원으로 왔고, 대장김류 등도 소수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제원으로 집결하여, 군사의 규모가 1천 4~5백여 명 정도가 되었다. 반정군은 한밤중에 술에 취해 [[창덕궁(昌德宮)]]에서 잠을 자고 있는 광해군을 급습하여, 마침내 정변에 성공하였다. 3월 13일 대장 김류가 서궁(西宮)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셔다가 복위(復位)시켰다.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인조가 즉위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인조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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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교동 현감(喬桐縣監)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훈되고,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졌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교동 현감(喬桐縣監)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훈되고,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졌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24년(인조 2) 봄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인조를 호위하였고, 공주(公州)로 가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면서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일을 대행(代行)하였다. 이괄이 패배하여 죽음을 당하자, 다시 직임을 회복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25년(인조 3) 전라도 병마사(全羅道兵馬使)가 되었는데[『인조실록』인조 3년 3월 21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자, 1만여 명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미처 서울에 당도하기도 전에 오랑캐 군사들이 물러갔으므로 곧 전라도 [[진영(鎭營)]]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10년 동안 황해도 병마사(黃海道兵馬使),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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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인조 2) 봄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인조를 호위하였고, 공주(公州)로 가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면서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일을 대행(代行)하였다. 이괄이 패배하여 죽음을 당하자, 다시 직임을 회복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25년(인조 3) 전라도 병마사(全羅道兵馬使)가 되었는데[『인조실록』인조 3년 3월 21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자, 1만여 명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미처 서울에 당도하기도 전에 오랑캐 군사들이 물러갔으므로 곧 전라도 [[진영(鎭營)]]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10년 동안 황해도 병마사(黃海道兵馬使),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27년(인조 5) 10월 인조의 서인 정권에 항거하여 이인거(李仁居)가 강원도 횡성(橫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거는 광해군 때 벼슬이 익찬(翊贊)이었는데, 이때 도당들을 모아 ‘창의 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고 군대를 일으켜 그 고을에 있는 군기를 탈취하였다. 이에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이 적은 곧 잡히겠지만 혹시라도 연결된 곳이 있을까 싶으니, 예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은밀히 하유하고, 신경인을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포수 7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양주(楊州)로 가게하며, [[초군(哨軍)]]은 양주의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전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10001_002 『인조실록』 인조 5년 10월 1일])  그리하여 오숙(吳䎘)을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하고 또 신경인·유림(柳琳)·이일원(李一元)을 토포사로 삼아 군병을 거느리고 횡성으로 가서 토벌 · 평정하도록 했다. 때마침 원주 목사(原州牧使)[[홍보(洪靌)]]가 관군을 이끌고 횡성으로 달려가서 이인거 부자(父子)와 그 도당들을 체포하고 그 사실을 보고하여 왔으므로 모두 잡아들이게 하여 법대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홍보 등 6명에 대하여는 [[소무공신(昭武功臣)]]으로 책훈하고, 모르고 이인거를 따랐던 무리들은 모두 불문에 붙이게 하였다.[『국조보감』 권35]
 
1627년(인조 5) 10월 인조의 서인 정권에 항거하여 이인거(李仁居)가 강원도 횡성(橫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거는 광해군 때 벼슬이 익찬(翊贊)이었는데, 이때 도당들을 모아 ‘창의 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고 군대를 일으켜 그 고을에 있는 군기를 탈취하였다. 이에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이 적은 곧 잡히겠지만 혹시라도 연결된 곳이 있을까 싶으니, 예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은밀히 하유하고, 신경인을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포수 7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양주(楊州)로 가게하며, [[초군(哨軍)]]은 양주의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전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510001_002 『인조실록』 인조 5년 10월 1일])  그리하여 오숙(吳䎘)을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하고 또 신경인·유림(柳琳)·이일원(李一元)을 토포사로 삼아 군병을 거느리고 횡성으로 가서 토벌 · 평정하도록 했다. 때마침 원주 목사(原州牧使)[[홍보(洪靌)]]가 관군을 이끌고 횡성으로 달려가서 이인거 부자(父子)와 그 도당들을 체포하고 그 사실을 보고하여 왔으므로 모두 잡아들이게 하여 법대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홍보 등 6명에 대하여는 [[소무공신(昭武功臣)]]으로 책훈하고, 모르고 이인거를 따랐던 무리들은 모두 불문에 붙이게 하였다.[『국조보감』 권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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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감 대장이흥립은 이미 비밀히 사위 장신을 통하여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장신은 장유의 동생으로서 최명길의 지시를 받고 장인을 설득하여, 그 협력을 얻어냈는데, 만약 이때 이흥립이 관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면, <인조반정>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명길이 이미 광해군의 연회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정 날짜를 연회가 있는 날로 정하고 자정을 넘긴 한밤중에 적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급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도감 대장이흥립은 이미 비밀히 사위 장신을 통하여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장신은 장유의 동생으로서 최명길의 지시를 받고 장인을 설득하여, 그 협력을 얻어냈는데, 만약 이때 이흥립이 관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면, <인조반정>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명길이 이미 광해군의 연회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정 날짜를 연회가 있는 날로 정하고 자정을 넘긴 한밤중에 적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급습할 계획을 세웠다.
  
이날 밤에 구굉은 조카 능양군을 모시고 연서역(延曙驛)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신경인 형제의 연락을 받고 대장김류, 부장이귀 등은 최명길과 · 김자점(金自點) · 심기원(沈器遠) 등과 홍제원에서 모였다. 장단 방어사이서는 부하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홍제원에 집결하였다. 또 이괄 · 이중로(李重老) · 장유 · 신경유 · 최내길(崔來吉) 등도 6~7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모두 와서 모였다. 군사가 모두 1천 4~5백여 여 명이었는데, 문무 장사(將士)가 2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들어가서, 창덕궁 문 밖에 도착했을 때, 도감 대장이흥립이 지휘봉을 버리고 달려와서 반정군을 맞이했으나,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궁성에 있던 대신과 여러 관리들은 반정군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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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에 구굉은 조카 능양군을 모시고 연서역(延曙驛)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신경인 형제의 연락을 받고 대장김류, 부장이귀 등은 최명길과 · 김자점(金自點) · 심기원(沈器遠) 등과 홍제원에서 모였다. 장단 방어사이서는 부하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홍제원에 집결하였다. 또 이괄 · 이중로(李重老) · 장유 · 신경유 · 최내길(崔來吉) 등도 6~7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모두 와서 모였다. 군사가 모두 1천 4~5백여 여 명이었는데, 문무 장사(將士)가 2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들어가서, 창덕궁 문 밖에 도착했을 때, 도감 대장이흥립이 지휘봉을 버리고 달려와서 반정군을 맞이했으나,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궁성에 있던 대신과 여러 관리들은 반정군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서 도망갔다.
  
 
대장김류 등이 단봉문(丹鳳門)을 열어젖히고 궁궐로 들어갔고, 능양군이 구굉 등과 함께 도착하니, 대장김류가 능양군을 인도하여 [[인정전(仁政殿)]] 서쪽 뜰 위에 나아가서 동향하여 호상(胡床)에 앉게 하고, 여러 장사들이 그 앞에 줄지어 서서 시위하자, 궁궐 안의 시위 장졸이 모두 흩어졌다. 이때 입직한 도승지이덕형 등이 선전관과 함께 반정군의 함성을 듣고 광해군의 침전(寢殿)의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미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도망하여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 평상시에 궁인들이 후원에 긴 사다리를 숨겨두고, 밤중에 몰래 출입하는 데에 이용하였는데, 이를 알고 있던 광해군이 이 사다리를 사용하여 궁궐의 높은 담을 넘어갔다. 젊은 내시의 안내를 받아서 [[사복시(司僕寺)]] 앞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 그 뒤에 안국신의 고발로 광해군은 붙잡혀서 반정군 앞으로 끌려 왔다. 3월 13일 대장김류가 서궁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셔다가 복위시키고,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즉위시켰다.
 
대장김류 등이 단봉문(丹鳳門)을 열어젖히고 궁궐로 들어갔고, 능양군이 구굉 등과 함께 도착하니, 대장김류가 능양군을 인도하여 [[인정전(仁政殿)]] 서쪽 뜰 위에 나아가서 동향하여 호상(胡床)에 앉게 하고, 여러 장사들이 그 앞에 줄지어 서서 시위하자, 궁궐 안의 시위 장졸이 모두 흩어졌다. 이때 입직한 도승지이덕형 등이 선전관과 함께 반정군의 함성을 듣고 광해군의 침전(寢殿)의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미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도망하여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 평상시에 궁인들이 후원에 긴 사다리를 숨겨두고, 밤중에 몰래 출입하는 데에 이용하였는데, 이를 알고 있던 광해군이 이 사다리를 사용하여 궁궐의 높은 담을 넘어갔다. 젊은 내시의 안내를 받아서 [[사복시(司僕寺)]] 앞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 그 뒤에 안국신의 고발로 광해군은 붙잡혀서 반정군 앞으로 끌려 왔다. 3월 13일 대장김류가 서궁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셔다가 복위시키고,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즉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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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風采)가 훤칠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타고난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였다. 신경인이 3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 신립이 탄금대(彈琴臺) 전투에서 달천(達川)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에 대해서 지극히 애통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신토록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 막내 신경인은 큰형 신경진을 아버지를 섬기듯이 섬기며, 그 가르침에 복종하기를 평생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삼 형제가 벼슬이 높아져 형제가 따로 살게 되어서도 날마다 항상 큰형의 곁에 모여서 서로 정담(政談)을 나누고 의지하였다. 그러나 가운데 형 신경유가 갑자기 죽자, 큰형이 너무나 슬퍼하므로, 동생 신경인은 자기의 슬픔보다 큰형을 위로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때 신경진은 매일 조정에서 퇴청하면, 동생 신경유의 [[신주(神主)]] 앞에서 한 시간씩 통곡하고 울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신경인은 친구를 대할 때에 반드시 두터운 은의(恩義)를 베풀었고, 번진(藩鎭)의 병마사(兵馬使)로 있을 때에는 대체로 청렴하고 근실함이 두드러졌으며, 군사를 통솔할 때는 위엄(威嚴)과 은혜(恩惠)가 있었으므로 사졸(士卒)들이 즐겁게 그를 따랐다. 포도대장이 되어서는 악한 무리들을 잘 체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명민함에 감탄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신경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風采)가 훤칠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타고난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였다. 신경인이 3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 신립이 탄금대(彈琴臺) 전투에서 달천(達川)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에 대해서 지극히 애통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신토록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 막내 신경인은 큰형 신경진을 아버지를 섬기듯이 섬기며, 그 가르침에 복종하기를 평생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삼 형제가 벼슬이 높아져 형제가 따로 살게 되어서도 날마다 항상 큰형의 곁에 모여서 서로 정담(政談)을 나누고 의지하였다. 그러나 가운데 형 신경유가 갑자기 죽자, 큰형이 너무나 슬퍼하므로, 동생 신경인은 자기의 슬픔보다 큰형을 위로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때 신경진은 매일 조정에서 퇴청하면, 동생 신경유의 [[신주(神主)]] 앞에서 한 시간씩 통곡하고 울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신경인은 친구를 대할 때에 반드시 두터운 은의(恩義)를 베풀었고, 번진(藩鎭)의 병마사(兵馬使)로 있을 때에는 대체로 청렴하고 근실함이 두드러졌으며, 군사를 통솔할 때는 위엄(威嚴)과 은혜(恩惠)가 있었으므로 사졸(士卒)들이 즐겁게 그를 따랐다. 포도대장이 되어서는 악한 무리들을 잘 체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명민함에 감탄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남한산성에서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청나라와 화친(和親) 조약을 맺을 때 청나라가 화친 조건의 하나로서 조정의 척화파 강신(强臣) 두세 명을 붙잡아 심양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아서 청나라와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남양군(南陽君)홍진도(洪振道) 등을 내세워서 장수와 군사 수백 명을 선동하여 대궐 앞으로 몰려와서 화친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소란을 부렸는데, 그 표면에는 홍진도가 나섰으나, 그 배후에는 신경진 · 신경인 형제가 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6_001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6일]) 그때 척화파 유학자들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 주화파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척화파 거물 김상헌(金尙憲)과 3학사 [[윤집(尹集)]] 등 수많은 사람들이 청나라 심양에 강제로 송환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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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청나라와 화친(和親) 조약을 맺을 때 청나라가 화친 조건의 하나로서 조정의 척화파 강신(强臣) 두세 명을 붙잡아 심양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아서 청나라와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남양군(南陽君)홍진도(洪振道) 등을 내세워서 장수와 군사 수백 명을 선동하여 대궐 앞으로 몰려와서 화친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소란을 부렸는데, 그 표면에는 홍진도가 나섰으나, 그 배후에는 신경진 · 신경인 형제가 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6_001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6일]) 그때 척화파 유학자들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 주화파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척화파 거물 김상헌(金尙憲)과 3학사 [[윤집(尹集)]] 등 수많은 사람들이 청나라 심양에 강제로 송환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와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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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는 충도(忠度)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우치(牛峙)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잠수(潛叟)박세당(朴世堂)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서계집(西溪集)』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東城君申公墓表)」]
 
시호는 충도(忠度)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우치(牛峙)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잠수(潛叟)박세당(朴世堂)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서계집(西溪集)』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東城君申公墓表)」]
  
첫째 부인은 고흥 유씨(高興柳氏)인데,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호군(護軍)]]이성길(李星吉)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으니, 제용정(濟用正)이경과(李慶果)의 처이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일찍이 형 신경진의 둘째아들 돈녕부 [[도정(都正)]]신해(申垓)를 후사(後嗣)로 삼았다.[『임하필기』 권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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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인은 고흥 유씨(高興柳氏)인데,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호군(護軍)]]이성길(李星吉)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으니, 제용정(濟用正)이경과(李慶果)의 처이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일찍이 형 신경진의 둘째아들 돈녕부 [[도정(都正)]]신해(申垓)를 후사(後嗣)로 삼았다.[『임하필기』 권15]
  
 
=='''참고문헌'''==       
 
=='''참고문헌'''==       

2018년 1월 9일 (화) 22:51 기준 최신판




총론

[1590년(선조 23)∼1643년(인조 21) = 54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무신.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지냈고, 봉작(封爵)은 동성군(東城君)이다. 자는 자정(子精) 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신립(申砬)이고, 어머니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만호(萬戶)최필신(崔弼臣)의 딸이다. 평성 부원군(坪城府院君)신경진(申景禛)과 동평군(東平君)신경유(申景裕)의 동생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나이 26세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며,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가 되었다.[『서계집(西溪集)』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東城君申公墓表)」] 1618년(광해군 10)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형 신경진이 처음으로 동생 신경유 · 신경인 등과 시국에 대해 불평하다가 반정(反正)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가까운 친척인 구굉(具宏)과 함께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기로 정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광해군이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고, 서인(西人)을 탄압하자, 신경진이 은밀히 구굉과 손을 잡고 반정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동생 신경유 · 신경인도 합심(合心)하여 형 신경진을 도왔고, 형 신경진은 가까운 친구 김류(金瑬) · 최명길(崔鳴吉) · 이귀(李貴) 등을 끌어 들여 모두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가자, 형 신경진은 그의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다가, 이를 눈치 챈 정승 박승종(朴承宗)에 의하여 효성령(曉星嶺) 별장(別將)으로 쫓겨났다. 이때 형 신경진은 거사의 계획을 동생 신경인과 최명길에게 맡기고, 평안도 박천(博川) 가산진(嘉山鎭)으로 떠났다.[『광해군일기』광해군 15년 3월 13일]

이때부터 동생 신경인은 형 신경진을 대신하여 최명길과 함께 반정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평안도 박천 가산진에 있는 형 신경진과 연락하면서 형의 지시에 따라, 구굉과 그 조카 구인후(具仁垕), 이귀와 그 아들 이시백(李時白) · 이시방(李時昉) 형제, 장유(張維) · 장신(張紳) 형제, 김류와 그 아들 김경징(金慶徵), 종실 효령대군 후손 이서(李曙) 등과 비밀히 연락을 취하며 반정의 시일과 방법을 논의하였다. 마침 이서가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에 임명되자, 장단(長湍)의 군사를 동원하기로 합의하였다. 최명길은 거사할 날짜를 1623년(광해군15) 3월 12일 밤중으로 정하여, 모두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기로 약속하였다. 예정한 날 밤중에 장단 방어사이서가 장단부의 군사 7백 명을 이끌고 몰래 홍제원으로 왔고, 대장김류 등도 소수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제원으로 집결하여, 군사의 규모가 1천 4~5백여 명 정도가 되었다. 반정군은 한밤중에 술에 취해 창덕궁(昌德宮)에서 잠을 자고 있는 광해군을 급습하여, 마침내 정변에 성공하였다. 3월 13일 대장 김류가 서궁(西宮)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셔다가 복위(復位)시켰다.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인조가 즉위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교동 현감(喬桐縣監)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훈되고,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졌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24년(인조 2) 봄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인조를 호위하였고, 공주(公州)로 가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면서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일을 대행(代行)하였다. 이괄이 패배하여 죽음을 당하자, 다시 직임을 회복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25년(인조 3) 전라도 병마사(全羅道兵馬使)가 되었는데[『인조실록』인조 3년 3월 21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자, 1만여 명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미처 서울에 당도하기도 전에 오랑캐 군사들이 물러갔으므로 곧 전라도 진영(鎭營)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10년 동안 황해도 병마사(黃海道兵馬使),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27년(인조 5) 10월 인조의 서인 정권에 항거하여 이인거(李仁居)가 강원도 횡성(橫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거는 광해군 때 벼슬이 익찬(翊贊)이었는데, 이때 도당들을 모아 ‘창의 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고 군대를 일으켜 그 고을에 있는 군기를 탈취하였다. 이에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이 적은 곧 잡히겠지만 혹시라도 연결된 곳이 있을까 싶으니, 예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은밀히 하유하고, 신경인을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포수 7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양주(楊州)로 가게하며, 초군(哨軍)은 양주의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전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 (『인조실록』 인조 5년 10월 1일) 그리하여 오숙(吳䎘)을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하고 또 신경인·유림(柳琳)·이일원(李一元)을 토포사로 삼아 군병을 거느리고 횡성으로 가서 토벌 · 평정하도록 했다. 때마침 원주 목사(原州牧使)홍보(洪靌)가 관군을 이끌고 횡성으로 달려가서 이인거 부자(父子)와 그 도당들을 체포하고 그 사실을 보고하여 왔으므로 모두 잡아들이게 하여 법대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홍보 등 6명에 대하여는 소무공신(昭武功臣)으로 책훈하고, 모르고 이인거를 따랐던 무리들은 모두 불문에 붙이게 하였다.[『국조보감』 권35]

1628년(인조 6) 2월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그해 9월 신공신(新功臣) · 구공신(舊功臣)과 공신의 여러 적장자(嫡長子)들에게 각각 1등급씩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정사공신 종2품하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었다가, 12월 다시 개정되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낮춰졌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2월 8일 · 9월 26일 · 12월 7일, 『인조실록』인조 6년 9월 26일] 1629년(인조 7) 4월 황해도 병마사가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4월 12일] 그 해 10월 황주(黃州)의 성지(城池)는 사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아 지킬 수 없는 형세였으므로 이를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인조실록』인조 7년 10월 10일] 국장도감(國葬都監)의 배왕 대장(陪往大將)을 맡았는데, 1632년(인조 10) 11월 국장이 끝난 다음에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인조실록』인조 10년 11월 22일]

1633년(인조 11) 6월 정사공신 가의대부 경기도 행 수군절도사(京畿道行水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월 정사공신 가선대부 전라우도 행 수군절도사(全羅道行水軍節度使)동성군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11년 6월 10일 · 10월 16일] 1635년(인조 13)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었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포위되었을 때 신경인은 체찰사부(體察使府)에 배속되어 중군(中軍)으로 있으면서 항상 힘을 다하여 오랑캐와 대항(對抗)했으므로 성중(城中)의 가장 중추적 역할을 하였었다. 1637년(인조 15) 봄에 포위가 풀리자, 전쟁 때의 노고(勞苦)로 인하여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고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남쪽 변방을 중시하였으므로, 재차 남방 진영에 통제사로 부임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40년(인조 18) 1월 포도대장으로 있었는데, 죄인을 엄하게 심문하지 않고 풀어 준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기강이 한번 해이해져 국가의 법이 엄하지 않게 되자, 무뢰배가 멋대로 횡행하며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전 현감석지형(石之珩)의 처가 홀로 서울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산성(山城)의 출신(出身)조사립(趙士立)이란 자가 그녀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이라는 것을 얕잡아 보고, 감히 강포한 꾀를 내어 여러 날 밤 와서 그녀를 겁탈하였습니다. 이에 이웃에 살고 있는 총융사(摠戎司) 중군(中軍)신경원(申景瑗)의 조사립을 붙잡아서 포도청에 고발하였는데, 포도대장신경인이 군관(軍官)들의 말을 잘못 듣고 엄하게 신문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풀어주었으니, 일이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대장신경인은 중하게 추고(推考)하고, 조사립은 법률대로 처단하소서.” 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인조실록』 인조 18년 1월 21일) 1641년(인조 19) 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에 임명되어 호위대장(扈衛大將) · 포도대장을 겸임하였고 1642년(인조 20) 경기도 수군절도사에 복직되었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1643년(인조 21) 5월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21년 5월 12일]

1643년(인조 21) 봄에 형 영의정신경진이 병이 위독해져 동생 신경인을 보고 싶어 하였으므로 인조가 급히 신경인을 불러 들였으나, 동생이 도착하기도 전에 신경진은 세상을 떠났다. 형 신경진은 막내동생 신경인보다 15년 연상이었으므로, 신경인이 아버지처럼 섬겼다. 그때 신경인은 어영대장에 특임(特任)되었으나, 형 신경진이 세상을 떠난 뒤로부터 벼슬에 관심이 없고 통곡(痛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병이 되어 5월 30일에 끝내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4세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인조반정>과 신경인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밤에 광해군이 어수당(魚水堂)에서 연회를 즐기면서 술에 취해 있었는데, 이이반(李而頒)이 정변을 고(告)하였다. 그날 낮에 이이반은 길에서 친구 이후원(李厚源)을 만났는데, 이후원이 “오늘 반정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함께 가기를 권하였으나, 이이반이 그를 따라 가지 않고 대궐에 나아가서 이후원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술에 취하여 그 고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과 정승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조사하도록 청하였으므로, 광해군이 한밤중에 의금부 당상관(堂上官)과 포도대장을 부르게 하고, 또 도승지(都承旨)이덕형(李德泂)과 병조 판서권진(權縉)을 입직하게 하였다. 대신 이하 관리들이 대궐에 나갔으나, 대궐문이 닫혀 있었으므로 비변사(備邊司)에 모였는데, 비변사 당상관들도 나와서 모였다. 광해군이 도감(都監) 대장(大將)이흥립(李興立)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게 하고, 천총이확(李廓)을 보내어 창의문(彰義門) 밖을 수색하게 하였으나, 자정이 넘어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도감 대장이흥립은 이미 비밀히 사위 장신을 통하여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장신은 장유의 동생으로서 최명길의 지시를 받고 장인을 설득하여, 그 협력을 얻어냈는데, 만약 이때 이흥립이 관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면, <인조반정>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명길이 이미 광해군의 연회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정 날짜를 연회가 있는 날로 정하고 자정을 넘긴 한밤중에 적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급습할 계획을 세웠다.

이날 밤에 구굉은 조카 능양군을 모시고 연서역(延曙驛)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신경인 형제의 연락을 받고 대장김류, 부장이귀 등은 최명길과 · 김자점(金自點) · 심기원(沈器遠) 등과 홍제원에서 모였다. 장단 방어사이서는 부하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홍제원에 집결하였다. 또 이괄 · 이중로(李重老) · 장유 · 신경유 · 최내길(崔來吉) 등도 6~7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모두 와서 모였다. 군사가 모두 1천 4~5백여 여 명이었는데, 문무 장사(將士)가 2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들어가서, 창덕궁 문 밖에 도착했을 때, 도감 대장이흥립이 지휘봉을 버리고 달려와서 반정군을 맞이했으나, 이확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궁성에 있던 대신과 여러 관리들은 반정군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서 도망갔다.

대장김류 등이 단봉문(丹鳳門)을 열어젖히고 궁궐로 들어갔고, 능양군이 구굉 등과 함께 도착하니, 대장김류가 능양군을 인도하여 인정전(仁政殿) 서쪽 뜰 위에 나아가서 동향하여 호상(胡床)에 앉게 하고, 여러 장사들이 그 앞에 줄지어 서서 시위하자, 궁궐 안의 시위 장졸이 모두 흩어졌다. 이때 입직한 도승지이덕형 등이 선전관과 함께 반정군의 함성을 듣고 광해군의 침전(寢殿)의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미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도망하여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 평상시에 궁인들이 후원에 긴 사다리를 숨겨두고, 밤중에 몰래 출입하는 데에 이용하였는데, 이를 알고 있던 광해군이 이 사다리를 사용하여 궁궐의 높은 담을 넘어갔다. 젊은 내시의 안내를 받아서 사복시(司僕寺) 앞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 그 뒤에 안국신의 고발로 광해군은 붙잡혀서 반정군 앞으로 끌려 왔다. 3월 13일 대장김류가 서궁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셔다가 복위시키고,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즉위시켰다.

성품과 일화

신경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風采)가 훤칠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타고난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였다. 신경인이 3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 신립이 탄금대(彈琴臺) 전투에서 달천(達川)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에 대해서 지극히 애통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신토록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 막내 신경인은 큰형 신경진을 아버지를 섬기듯이 섬기며, 그 가르침에 복종하기를 평생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삼 형제가 벼슬이 높아져 형제가 따로 살게 되어서도 날마다 항상 큰형의 곁에 모여서 서로 정담(政談)을 나누고 의지하였다. 그러나 가운데 형 신경유가 갑자기 죽자, 큰형이 너무나 슬퍼하므로, 동생 신경인은 자기의 슬픔보다 큰형을 위로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때 신경진은 매일 조정에서 퇴청하면, 동생 신경유의 신주(神主) 앞에서 한 시간씩 통곡하고 울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신경인은 친구를 대할 때에 반드시 두터운 은의(恩義)를 베풀었고, 번진(藩鎭)의 병마사(兵馬使)로 있을 때에는 대체로 청렴하고 근실함이 두드러졌으며, 군사를 통솔할 때는 위엄(威嚴)과 은혜(恩惠)가 있었으므로 사졸(士卒)들이 즐겁게 그를 따랐다. 포도대장이 되어서는 악한 무리들을 잘 체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명민함에 감탄하였다.[『서계집』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

남한산성에서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청나라와 화친(和親) 조약을 맺을 때 청나라가 화친 조건의 하나로서 조정의 척화파 강신(强臣) 두세 명을 붙잡아 심양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아서 청나라와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남양군(南陽君)홍진도(洪振道) 등을 내세워서 장수와 군사 수백 명을 선동하여 대궐 앞으로 몰려와서 화친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소란을 부렸는데, 그 표면에는 홍진도가 나섰으나, 그 배후에는 신경진 · 신경인 형제가 있었다.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6일) 그때 척화파 유학자들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 주화파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척화파 거물 김상헌(金尙憲)과 3학사 윤집(尹集) 등 수많은 사람들이 청나라 심양에 강제로 송환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도(忠度)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우치(牛峙)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잠수(潛叟)박세당(朴世堂)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서계집(西溪集)』 권14 「동성군 신공 묘표(東城君申公墓表)」]

첫째 부인은 고흥 유씨(高興柳氏)인데,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호군(護軍)이성길(李星吉)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으니, 제용정(濟用正)이경과(李慶果)의 처이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일찍이 형 신경진의 둘째아들 돈녕부 도정(都正)신해(申垓)를 후사(後嗣)로 삼았다.[『임하필기』 권15]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계집(桐溪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상촌집(象村集)』
  • 『속잡록(續雜錄)』
  •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만운집(晩雲集)』
  • 『명곡집(明谷集)』
  • 『지천집(遲川集)』
  • 『지호집(芝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