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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에 있으며, 이민구( | + |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에 있으며,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중망(衆望)이 있었다. 비록 출중한 재능은 없었으나 청렴하게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를 허물하지 못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복상(福相)’이라고 칭송하였다. |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중망(衆望)이 있었다. 비록 출중한 재능은 없었으나 청렴하게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를 허물하지 못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복상(福相)’이라고 칭송하였다. |
2018년 1월 9일 (화) 22:4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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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권철 |
한글표제 | 권철 |
한자표제 | 權轍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경유(景由) |
호 | 쌍취헌(雙翠軒) |
시호 | 강정(康定)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03년(연산군9) |
사망 | 1578년(선조11) |
본관 | 안동(安東)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
증조부 | 권마(權摩) |
조부 | 권교(權僑) |
부 | 권적(權勣) |
모_외조 | 순흥안씨(順興安氏): 안탁(安擢)의 딸 |
형제 | (형)권지(權軹) |
처_장인 |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승현(曺承睍)의 딸 |
자녀 | (1자)권항(權恒) (2자)권개(權愷) (3자)권순(權恂) (4자)권율(權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권철(權轍) |
총론
[1503년(연산군9)∼1578년(선조11) = 76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경유(景由)이고, 호는 쌍취헌(雙翠軒)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강화부사(江華府使)권적(權勣)의 아들이며, 권율(權慄) · 권순(權恂)의 아버지이다. 또 안탁(安擢)의 외손자이고, 조승현(曺承睍)의 사위이다.
명종~선조 시대의 복상
1534년(중종29)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는데, 육조(六曹)는 병조 좌랑 · 이조 좌랑 · 병조 정랑 · 형조 정랑을, 사유(師儒)는 성균관 직강(直講)을, 논사(論思)는 홍문관 교리(校理)를, 언관(言官)은 사헌부 지평(持平) · 사간원 헌납(獻納)을, 제서(諸署)는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 · 선공감(繕工監) 부정 · 사섬시(司贍寺) 부정 · 장악원(掌樂院)정(正) · 사복시(司僕寺) 정을, 춘방(春坊)은 문학(文學) · 필선(弼善)을, 의정부(議政府)는 검상(檢詳) ·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50년(명종5)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다. 1554년(명종9)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경상도관찰사 ·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56년(명종11) 명종이 직접 형조 판서로 발탁하여, 중추부 지사 · 병조 판서 · 형조 판서, 1562년(명종17)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임명하였다. 1566년(명종21) 세력가 병조 판서윤원형(尹元衡)이 죄를 얻어 물러나자,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되었다. 1567년(선조즉위)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고 1571년(선조4)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선조 초년에 수상으로서 6년 동안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1573년(선조6) 병으로 사직하니, 돈녕부 영사에 임명하였다.
묘소와 사평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에 있으며,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중망(衆望)이 있었다. 비록 출중한 재능은 없었으나 청렴하게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를 허물하지 못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복상(福相)’이라고 칭송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석담일기(石潭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청음집(淸陰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사계전서(沙溪全書)』
- 『간이집(簡易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