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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3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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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광계 |
한글표제 | 윤광계 |
한자표제 | 尹光啓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광계(尹光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宣祖實錄)』 34년 6월 16일, 『선조실록』 34년 9월 18일, 『선조실록』 36년 1월 21일, 『선조실록』 37년 11월 12일, 『선조실록』 39년 5월 15일, 『선조실록』 39년 6월 7일, 『선조실록』 40년 5월 26일,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1년 6월 19일 |
총론
[1559년(명종 14)∼? = ?].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이자 시인. 행직(行職)은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와 호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자는 경설(景說)이고, 호는 귤옥(橘屋)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거주지는 전라도 해남 낙안(樂安)이다. 아버지는 윤화중(尹和中)이고, 어머니 평창 이씨(平昌李氏)는 이희양(李希陽)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낸 윤행(尹行)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생원(生員)1 윤효정(尹孝貞)이다. 조헌(趙憲)의 수제자로서, 선조 때에 강항(姜沆)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혔다. <최영경(崔永慶) 옥사> 때 성혼(成渾)의 배후설을 제기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거움을 삼았고, 명예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인(西人) 김상헌(金尙憲)에게 사사하고, 그 아들 김광찬(金光燦)과 아주 절친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1589년(선조 22)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방목』]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들어가서 시강관(侍講官)이 되었다.
1601년(선조 34)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設書)가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34년 6월 16일),(『선조실록』 34년 9월 18일) 그때 지제교(知製敎) 겸(兼) 춘추관 기주관(記註官)에 임명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역대 실록이 모두 불타 없어지던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강화도의 마니산본을 재간행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603년(선조 36) 1월 역대 실록을 재간행하여 전국의 5대 사고(史庫)에 배치하게 되자, 선조가 명하기를, “교정(校正)에 대한 상격(賞格)을 다시 생각해보니, 하루 일한 사람과 수십 일 동안 일한 사람을 똑같이 상주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듯하다. 그리고 낭청(郎廳)을 승직시킨다면 당상관들도 승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낭청강복성(康復誠)·이덕윤(李德胤)·김광엽(金光燁)·윤광계(尹光啓)를 모두 승직시키라.” 하였다.(『선조실록』 36년 1월 21일) 이에 윤광계는 실록 교정에 참여한 공로로 6품으로 승품하였고, 1604년(선조 37) 11월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7년 11월 12일)
1606년(선조 39) 5월 평안도도사로 나갔는데, 그해 6월 사간원에서 “평안도도사는 다른 도에 비하여 긴급히 처리할 업무가 많은데, 신임 도사윤광계는 술을 즐기는 것이 병이 되어 정신이 혼미한 탓으로 제반 사무를 감당할 수가 없으니, 체차시키소서.” 하고 탄핵하니, 선조가 그를 파직하였다.(『선조실록』 39년 5월 15일),(『선조실록』 39년 6월 7일) 1607년(선조 40) 다시 기용되어, 공조 좌랑이 되었다.(『선조실록』 40년 5월 26일)
광해군 시대 활동
광해군(光海君) 시대에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鄭仁弘)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 윤광계는 친구 최영경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최영경이 옥에 함께 갇혔던 윤광계에게 말하기를, ‘내가 성혼과 절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하였다.
한편 윤광계는 동인(東人)의 강경파 이발(李潑)의 6촌 형제였으나, 성혼・이이(李珥)의 제자인 조헌에게 수학하였으므로 이발과 논의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서인인 김상헌을 사사하고 그 아들 김광찬과 아주 뜻이 맞았다. 그러므로 광해군 시대에는 말단 관직을 전전하다가 고향 전라도 해남 낙안(落雁)으로 은퇴하여 10여 년을 지냈다.[『청음집(淸陰集)』 권2]
1619년(광해군 11) 6월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이이첨(李爾瞻)이 아뢰기를, “신과 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으나, 노쇠함이 점점 심해지자 정신이 나날이 감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후진을 끌어주고 싶어서 감히 당하관 몇 명을 별도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하고, 문학을 장려하도록 건의하면서 윤광계를 비롯하여 허적(許摘)·조익(趙翼)·이민구(李敏求)·이식(李植) 등 전국 8도 문사(文士) 33명을 뽑아서 천거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11년 6월 19일) 이때 윤광계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문학가로서 이에 뽑혔다.
그가 죽은 연대도 기록이 없는데, 광해군 말년에 술병으로 고향 낙안에서 죽은 듯하다. 서인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음에도 이후 그가 등용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는 광해군 말년에 죽은 것이 분명하다.
그가 죽은 뒤 60여 년이 지나 증손자 윤인후(尹仁厚)·윤천후(尹天厚) 형제가 그의 시문(詩文)을 모아 1680년(숙종 6) 9월 문집인 『귤옥집(橘屋集)』을 간행하였다. 문집의 서문은 서인인 영의정김수항(金壽恒)이 쓰고, 그 발문(跋文)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이 썼는데, 그가 광해군 시대 서인의 지조를 지키고 살았기 때문이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48] 그의 시는 정련(精鍊)되고 율조(律調)가 청아하여, 선조와 광해군 시대를 풍미하였다.
최영경 옥사와 윤경계의 증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인의 과격파인 좌의정정철(鄭澈)을 위관(委官)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하였다. 정여립은 선조가 왕으로서 자질이 없다고 비판하고, 『정감록(鄭鑑錄)』의 참위설(讖緯說)에 근거하여, “이씨 왕조를 멸망시키고 정씨가 일어나야 한다.”는 ‘혁성혁명론’을 부르짖으며, 대동계(大東契)를 조직하여 전라도・충청도・황해도로 확대하였다. 황해도감사(黃海道監司)한준(韓準)과 신천군수(信川郡守)한응인(韓應寅) 등이 황해도에서 대동계를 발각하여 고발하면서 관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고, 정여립은 충청도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도피하였다가 자살하였다.
그때 전라도 출신 성균관 유생(儒生) 정암수(丁岩壽) 등이 정여립 모반 사건의 배후로 이발 등의 동인 과격파 수백 명을 고발하였다. 위관 정철은 정암수의 소장에 거명된 동인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심문하여, 이발과 최영경 등 거의 1천여 명을 처형하였다. 이것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하는데, 서인 정철이 정여립 모반 사건을 심문하다가 정암수의 소장을 계기로 삼아 사건을 기축옥사로까지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때 윤광계는 이발의 6촌 동생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최영경은 수염이 길다는 이유로 정여립 모반 사건의 주모자 길삼봉(吉三峰)이라고 지목되어 체포되면서 윤광계와 최영경은 같은 감옥에서 심문을 받으며 한 감방에 있게 되었다.
최영경은 비록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었으나 항상 꿇어앉았으며 한 번도 기대어 앉은 적이 없었다. 그는 끝까지 자기가 길삼봉이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형장(刑杖)을 맞고 옥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죽을 때에 윤광계에게 고하기를,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성혼과 절교한 까닭으로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때 윤광계는 최영경이 옥에서 겪었던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그 끝에 최영경의 “그는 정도(正道)를 지키다가 죽었다고 할 만하다.”고 덧붙였다.[『기축록(己丑錄)』 상권] 나중에 최영경의 절친한 친구인 정인홍이 최영경의 행장을 지을 때에 윤광계의 글을 인용하여 성혼 때문에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고, 서인의 정철과 윤두수(尹斗壽), 그리고 성혼을 공격하였다. 이이와 성혼은 서인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므로, 서인들은 정인홍이 최영경 행장에서 윤광계의 증언을 일부러 인용하여 사실을 날조하였다고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심지어 서인들은 윤광계는 감옥에 들어간 적도 없었다고 부인하였는데, 왜냐하면 윤광계는 서인과 가까웠기 때문에 감옥에서 곧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5, 6년 전에 유성룡(柳成龍)과 이발이 틈이 생겨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졌다. 유성룡의 온건파는 유성룡을 영수로 하여 김성일(金誠一)·이성중(李誠中)·이덕형(李德馨) 등이 우익(羽翼)이 되었고, 이발의 강경파는 이발을 수령으로 하여 정여립·최영경·정인홍 등이 우익이 되어 서로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이후 정여립 모반 사건 때 동인의 강경파 이발・최영경 등이 서인 정철에게 잡혀가서 죽을 때 동인의 온건파 유성룡이 그들을 구원해 주지 않았다고 하여, 정인홍과 유성룡이 영원히 원수가 되면서 비로소 남인(南人)・북인(北人)의 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혼정편록(混定編錄)』 권5]
광해군 때 북인 정인홍이 서인들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를 둘러싸고 당쟁을 벌이다가, <정청운동(庭請運動)>을 전개하여 서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는데, 그 배경에는 친구 최영경의 억울한 죽음을 보복하려는 뜻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광해군 때 윤광계는 10년 동안 해남에서 은거하고 있었으나, 그의 증언은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북인과 서인의 끊임없는 당파 싸움의 대상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서인 정권이 들어서고, 북인 정인홍이 죽음을 당한 뒤에도 그 논쟁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1636년(인조 14) 11월 전라도 보성(寶城)에 살고 있는 안방준(安邦俊)이 상소하기를, “정인홍이 성혼을 모함하고자 하였으나, 정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자, 최영경의 행장을 지으면서 거짓으로 꾸며내지 않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최영경이 죽을 때에 함께 잡혀 있던 윤광계에게,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성혼과 절교한 까닭으로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한 것과 같은 구절은 곧 정인홍이 성혼을 모함하는 대표적인 글입니다. 윤광계는 신과는 친구 사이이며, 지금 보성에서 하룻길밖에 안 되는 해남에 살고 있는데, 평생 동안 감옥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뒤에 정인홍과 왕래한 호남 사람들이 이를 따지기를, ‘최영경의 행장 속에 윤광계에 대한 구절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니, 그 밖의 다른 말도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을 터인데, 이게 어찌 된 것입니까.’ 하니, 정인홍이 ‘당초에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윤광계는 이발의 가까운 친척으로 옥에 갇혔다가 매를 맞아 죽었으며, 그때 최영경이 같은 감옥에 있다가, 윤광계에게 그렇게 말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뒤에 들으니,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하니, 내가 이를 행장에서 삭제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였다.[『혼정편록』 권9]
성품과 일화
윤광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송시열은 그의 인품과 시를 비교하기를, “시가 그 사람만 같지 못하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윤광계를 일컬을 만한 것이 그 시에 있겠는가, 아니면 그 사람에게 있겠는가. 어찌 시속 사람들과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광계의 인품은 아름다운 시보다 고매하고 청아하였다. 다만 술을 좋아하여 병이 되어 정신이 혼미한 때가 많았다.
젊어서 조헌에게 배웠는데, 1587년(선조 20) 조헌이 정여립을 논박하는 상소문을 5차에 걸쳐 올렸다가 동인의 과격파에 의하여 관직에서 쫓겨나서 옥천(沃川)에 은거하자, 그도 과거에 급제한 뒤에 동인에게 배척을 받아 조정의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하지 못하고, 6품 이하의 벼슬에 머물렀다. 광해군 시대에는 뜻하지도 않게 최영경 옥사에 증인으로 내몰려서 북인과 서인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하고 냉대를 당하여, 하위(下位)의 관직에 머물다가, 고향 낙안으로 돌아갔으나, 오히려 정도(正道)를 걷고 사도(邪道)에 흔들리지 않았다.
한편 여러 소인배(동인)들이 조헌을 미워하여 조헌과 잠시 말을 나눈 자도 모두 잡아다가 법률로 다스렸기 때문에 평소에 그를 잘 아는 친구들도 태도를 바꾸어 조헌의 대문 앞을 지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윤광계는 언제나 한결같이 성심으로 조헌을 섬기고 따랐다. 윤광계가 마침내 역경(逆境)에 놓인 채 일생을 마쳤으나,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조헌의 어짊이 더욱 클수록 윤광계의 의리(義理)가 더욱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송자대전』 권148]
고향 낙안에 돌아와서는 거처하는 집 둘레에 유자나무를 심고 귤나무 집이라는 뜻의 ‘귤옥(橘屋)’이라는 정자를 짓고, 스스로 호를 ‘귤옥(橘屋)’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시부(詩賦)를 짓고 읊으면서, 세상에 대한 마음을 비우고 지냈다. 그는 시로써 이웃 고을에 사는 강항과 쌍벽을 이루었으므로, 한때 전라도 유생(儒生)들이 추종하고 동료 시인들이 인정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시문을 짓는 일에만 온전히 전념하지도 않았다.[『귤옥집(橘屋集)』]
한평생 시와 술로 즐거움을 삼으며 명예나 벼슬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서울 도성 안으로 이사하여 인왕봉(仁王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날마다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는데, 날마다 술을 가져다가 마시더라도 그는 주인에게 술값이 얼마인가를 묻지 않았으며, 술집 주인도 그에게 술값을 언제 갚을 것인가를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을철 남쪽에서 오는 배가 미곡을 싣고 강가에 와서 닿으면 그때는 쌀을 나누어 술집으로 보냈는데, 그 가마니 숫자를 헤아리지 않았다. 그 당시 그는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서울에 들어온 지 3년 동안에, 친척집 조상(弔喪)으로 의관을 갖추고 나간 적이 겨우 두 번뿐이었다.” 하였다.[『기옹만필(畸翁漫筆)』]
송시열은 『귤옥집』 발문(跋文)에서 그의 시문과 교우 관계를 논하기를, “윤광계의 시가 비록 이백(李白)·두보(杜甫)와 방불하고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을 능가하였지만, 윤광계의 사람됨을 보면, 그는 스스로 부족하게 여겼으며, 항상 선배에게 겸손하였다. 그러나 윤광계의 이와 같은 훌륭한 점을 아는 자가 드물다. 오직 문정공(文正公)김상헌 선생만이 이를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가 훈지(塤篪 : 악기 훈과 지가 서로 화음이 이루어짐)와 같았고, 그들의 교분(交分)이 금석(金石)과 같았으니, 이는 윤광계가 남긴 글에서 상고하면 알 수 있다.” 하였다.[『송자대전』 권148]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보성군 낙안에 있다.
그의 후손은 『귤옥집(橘屋集)』의 간행을 통하여 증손자 윤인후(尹仁厚)·윤천후(尹天厚) 형제가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귤옥집(橘屋集)』
- 『기옹만필(畸翁漫筆)』
- 『기축록(己丑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혼정편록(混定編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