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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2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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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변이중 |
한글표제 | 변이중 |
한자표제 | 邊以中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학자/과학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언시(彦時) |
호 | 망암(望庵)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46년(명종1) |
사망 | 1611년(광해군3) |
본관 | 황주(黃州) |
주거지 | 전라도 장성(長城) |
묘소소재지 | 전라도 장성(長城) 구기봉(九岐峯) |
증조부 | 변호(邊浩) |
조부 | 변처정(邊處楨) |
부 | 변택(邊澤) |
모_외조 | 함풍이씨(咸豊李氏): 이긍(李兢)의 손녀「묘갈명」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응규(李應奎)의 딸『방목』 |
처_장인 | (첫째부인)나주오씨(羅州吳氏): 오인준(吳仁俊)의 딸 →(자녀)2남 (둘째부인)진산소씨(晉山蘇氏): 소형선(蘇亨善)의 딸 →(자녀)4남2녀 |
자녀 | (1자)조졸 (2자)변경윤(邊慶胤) (3자)변소윤(邊蘇胤) (4자)변효윤(邊孝胤) (5자)변후윤(邊厚胤) (6자)변달윤(邊達胤) (1녀)김자점(金自點)의 처 |
저술문집 | 『망암집(望庵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변이중(邊以中) |
총론
[1546년(명종1)~1611년(광해군3) = 66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 학자.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이다. 본관은 황주(黃州)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장성(長城)이다. 아버지는 변택(邊澤)이고, 어머니 함풍이씨(咸豊李氏)는 이조 참판이긍(李兢)의 손녀이다. 김자점(金自點)의 장인이고,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 교서관(校書館)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어,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576년(선조9)과 1577년(선조10)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상기를 마치고, 관례에 따라 성균관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감찰(監察)로 승진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공조 · 호조 ·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나갔다.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갔는데 그때 권세가의 청탁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판결하지 못하던 송사를, 그가 즉시 결단하였다. 관찰사가 여러 차례 부탁하였으나 끝까지 판결을 고치지 않았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있다가 예조 좌랑과 봉상시(奉常寺)첨정(僉正)에 임명되었는데, 왜적이 전라도로 침입하지 않고 바로 북상하자, 전라도 소모사(召募使)로 파견되어 모병(募兵)을 담당하였다. 곧장 전라도로 가서, 불과 한 달 만에 근왕병(勤王兵) 수천 명을 모으고 전마(戰馬)와 군기(軍機)를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수원(水原)으로 진군해 기호(畿湖) 지방의 왜적과 싸웠다. 그러나 명(明)나라의 원정군이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소모사가 필요 없다며 그를 해임하고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조도어사(調度御史)에 임명하였다. 그는 “대적(大敵)이 아직 서울에 머물고 있는데, 병사들을 해산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항의하고, 돌아와서 친히 정예병을 이끌고 양천(陽川)에 이르러, 전후로 여러 차례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그때 그는 화차(火車) 3백 대를 만들어 순찰사(巡察使)권율(權慄)에게 보내어 <행주대첩(幸州大捷)>을 도왔다.
조정에서 군량미 조달이 매우 급하다면서 변이중에게 다시 조도(調度)의 책임을 맡겼으므로, 그는 군사를 병마사(兵馬使)에게 맡기고 호남(湖南) 지방으로 가서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군기시(軍器寺)정(正)에 임명되었다가 종부시(宗簿寺)로 자리를 옮겼는데, 갑자기 분 호조를 두게 되자 강화도로 가서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그 사이 상주목사(尙州牧使)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되었으나, 군량미 보급 때문에 결국 부임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군량미 운반을 감독하는 독운사(督運使)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조달한 곡식이 무려 수십 만 석이나 되었고, 명나라 군문으로 공급한 군량미만 30여 만 석이었다. 군량미 공급에 관여한 관원들이 모두 상전을 받을 때, 변이중만 홀로 빠졌으나,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1597년(선조30) 도체찰사(都體察使)유성룡(柳成龍)이 전라도가 왜란 때 군량미를 조달하고 경비를 대느라 민력(民力)이 고갈되었으니, 그 지역 출신 인재로서 변이중과 정설(鄭渫)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99년(선조32)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나갔다가, 1600년(선조33) 사옹원(司饔院) 정에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36)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나갔으나, 1605년(선조38) 병으로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서 정양하다가, 1611년(광해군3) 고향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6세였다.
저서로『망암집(望庵集)』이 있다.
화차의 발명
1592년 <임진왜란> 때 소모사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왜적과 싸워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변이중이 만든 화차는 수레 속에 40군데 총구멍을 내어 구멍마다 승자총(勝字銃)을 장전하고 그 심지를 서로 이어놓아, 한 번 심지에 불을 붙이면 차례로 포가 발사되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이 화차 한 대를 끌고 다니면서 총포를 마음대로 쏠 수가 있어, 이리저리 화차의 방향을 바꾸어 여러 각도에서 왜적과 대응하여 싸울 수가 있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고려 말엽 1380년(우왕6)에 원수(元帥)최무선(崔茂宣)이 금강(錦江) 입구 진포(鎭浦) 싸움에서 처음으로 연속 발사되는 화포로 왜구의 선박 5백여 척을 폭파하여 대승을 거둔 일이 있다. 또 『세종실록 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의 「군례(軍禮)」에 보이는 ‘사전총통(四箭銃筒)’ · ‘팔전총통(八箭銃筒)’이라는 화전(火箭)은 화차(火車)의 개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변이중의 화차는 고려 말엽부터 세종 시대를 거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온 화차를 이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보면, “<임진왜란> 때에 호남 지방 소모사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 3백 대를 만들어 순찰사권율에게 보내어 행주대첩을 도왔다. 그 원리는 한 화차에 40개의 구멍을 내고 승자총 40개를 끼워 넣어서 심지에 불을 붙여 연속으로 끊이지 않고 발사하도록 하니 그 소리가 산악을 진동하여 왜인들이 크게 놀라서 도망갔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화차가 비록 널리 쓰인 것은 아니었으나, 권율의 행주대첩에 사용되어 큰 성과를 내었다. 뿐만 아니라 박진(朴晉)이 경주(慶州)를 탈환하는 때에도 이 화차를 써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화차는 중요한 군사 병기(兵器)가 되어, 1679년(숙종5) 화차 1백 대를 제조하는 등 여러 차례 화차를 만들어 군영(軍營)에 배치하였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조선 후기에 훈련도감(訓練都監)에 화차 121대, 금위영(禁衛營)에 화차 56대, 어영청(御營廳)에 화차 10대 등을 상비(常備)하였다. 변이중은「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을 지어서 화차를 제조하는 방법을 후대에 전하였다. 변이중의 화차는 우리나라 무기 발달사에 있어서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된다.
성품과 일화
변이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굳세고 바르며, 뜻을 지킴이 확고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적과 싸울 때 두려워하여 물러서려는 자가 있으면 단호히 처형하고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번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려 시류(時類)를 좇지 않았으며, 더불어 사귀는 사람들은 모두 당세의 명인(名人)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재주와 기량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문예(文藝)가 일찍 이루어져서 약관(弱冠)의 나이에 향시에 합격하여 준걸하다고 소문이 났다. 뒤에 우계성혼과 율곡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항상 질문하고 열심히 강론하기에 힘썼으므로 두 선생의 칭찬을 받았으며, 사암(思菴)박순(朴淳)은 그의 재주를 크게 칭찬하여 장차 크게 쓰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를 가르친 사람들이 조정에 오래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도 또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독서를 할 때 항상 뜻과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다.
예문(禮文)에 더욱 정통하여 고례(古禮)의 절목(節目) 가운데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모두 고증하였다. 만년에는 고향 장수에서 한가하게 지내면서, 시골의 부로(父老)들과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 떠 봄가을로 예법을 강론하니, 향속(鄕俗)이 크게 교화되었다. 1576년(선조9)과 1577년(선조10)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한 나머지 생명을 잃을 뻔하였다. 상례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으며, 부모 묘소 아래 작은 암자를 짓고 묘를 바라보면서 절을 하고 호곡(號哭)하였는데, 이때 자기 호를 스스로 ‘망암’이라고 했다.
1593년(선조26) <임진왜란> 중에 전라도 소모사가 되어 근왕병을 수천 명 모아서 행재소로 향하다가, 죽산(竹山)에 주둔한 왜적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변이중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소집한 군사를 이끌고, 옛날 진법(陣法)을 본 떠 우차(牛車)를 많이 준비하여 학익진(鶴翼陣)을 갖추고 왜적의 주둔지에 도착하였다. 이때 왜적들이 칼을 휘두르며 풀숲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어지럽게 공격하니, 우리 군사들이 참패해서 흩어졌다. 왜적이 또 횃불을 던져서 우차를 불태우니, 우차 안에 있던 우리 군사들이 모두 죽었으며, 변이중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여기에서 우차는 화차를 말하는데, 이 전투에서는 화차로 왜적과 싸워서 패배하였으나, 화차의 단점을 보완한 다음 행주대첩에서는 화차를 이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장성 구기봉(九岐峯)에 있는데, 강항(姜沆)이 지은 묘지명과 이정귀(李庭龜)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위성공신(衛聖功臣)을 책봉할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어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장성의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 나주오씨(羅州吳氏)는 학생 오인준(吳仁俊)의 딸로, 2남을 낳았는데, 차남 변경윤(邊慶胤)은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를 지냈다. 둘째 부인 진산소씨(晉山蘇氏)는 부장(部將)소형선(蘇亨善)의 딸로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변소윤(邊蘇胤) · 변효윤(邊孝胤) · 변후윤(邊厚胤) · 변달윤(邊達胤)이고, 맏딸은 김자점에게 시집갔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월사집(月沙集)』
- 『망암집(望庵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서애집(西厓集)』
- 『양촌집(陽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홍재전서(弘齋全書)』
- 『미암집(眉巖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사류재집(四留齋集)』
- 『선원유고(仙源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