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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2 판




총론

[1576년(선조9)∼1627년(인조5) = 52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이다. 본관은 진천(鎭川)인데,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사섬시(司贍寺)봉사(奉事)송응일(宋應一)이고,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별제(別提) 박응현(朴應賢)의 딸이며 이조 판서박충원(朴忠元)의 손녀이다. 승지(承旨)송하(宋賀)의 손자이고, 병조 정랑송국경(宋國經)의 증조부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활인서(活人署)별제(別提)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 등을 지냈다. 1615년(광해군7)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注書)에 보임되었으나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일파에 의하여 쫓겨났다. 그 뒤에 교서관(校書館)과 태상시(太常寺)의 말직(末職)을 전전하다가, 1621년(광해군13) 병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얼마 안 되어 평안도평사(平安道評事)로 좌천되었는데, 부임하지 않고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광해군 시대 이이첨 일당이 그의 기세를 꺾으려고 온갖 탄압을 다하였으나, 그는 지조를 굳게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평안도선유어사(平安道宣諭御史)로 임명되어, 평안도 지방을 위무하였다.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가,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병조 정랑으로 전임하였다. 1624년(인조2) 의주판관(義州判官)에 갑자기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오래도록 조정에 사은(謝恩)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조에서 그가 변방 고을에 부임하는 것을 꺼린다고 탄핵하고 영유현령(永柔縣令)으로 좌천시켰다.

정묘호란 때 안주성 싸움

1627년(인조5) 1월 후금(後金)의 군사가 한밤중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여러 고을이 무너졌다. 그때 평안도병마사남이흥(南以興)은 평안도 안주(安州)가 적의 침입로가 되므로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역이라고 생각하여, 각 고을에 파발문을 보내고 수영패(隨營牌) 3백 명을 인솔하여 급히 안주로 달려가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영유현령송도남도 여러 고을의 수령들과 함께 자기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차례로 들어갔다. 병마사남이흥과 다른 고을 수령들이 그에게 서생(書生)이라고 하여 돌아가기를 권하니, 송도남이 분연히 나서면서 “국난(國難)을 맞아서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어찌 무부(武夫)만의 일이겠습니까?” 하고, 격문(檄文)을 지어 후금의 군사에게 화약(和約)을 저버리고 내침(來侵)한 죄를 성토하였다. 후금의 군사가 안주성에 닥치자, 쇠갑옷[鐵衣]을 벗어서 나무에 걸고, “성이 함락될 터인데, 몸을 보호해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 싸웠다. 손수 그 아들에게 글을 써 보내기를, “남아의 사업이 오늘 결판이 날 것이다.” 하였다. 성이 함락되었는데도 여전히 전포(戰袍)를 입고 성 머리에 서서 활을 당겨서 적에게 쏘아댔다. 적의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몰려서 날아왔으나, 끝내 활을 놓지 않고 싸우다가 마침내 적의 화살에 맞아 성가퀴를 베고 죽었는데, 향년이 52세였다. 겸인(傔人)김승(金承)과 현속(縣屬)이위전(李韋典) 등이 그 시신을 거두었다. 일설에는 그가 싸움을 독려하다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병사남이흥이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할 때 같이 따라서 죽었다고 한다.

성품과 일화

송도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비분강개하고 지조가 있었다. 광해군 때 그의 지친(至親)이 정승이 되자, 마치 몸을 더럽힐 것처럼 그를 피하였다. 태학(太學)의 장의(掌議)가 되었을 때 폐모론을 주장한 정조(鄭造) · 윤인(尹訒) · 이위경(李偉卿)을 토죄(討罪)할 것을 청했다가, 대북파 이이첨의 눈 밖에 나서, 과거에 급제한 다음에도, 교서관(校書館)의 말직에 임명되어 모욕을 당하였다. 또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도 성격이 너무 강직하여 당로(當路)에 있는 집권자들에게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이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

묘소와 추모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축석현(祝石峴)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되었다. 증손자 송국위(宋國緯)의 부탁으로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권10) 숙종 때 그의 손자 송정필(宋廷弼)의 요청으로 정표(旌表)가 세워졌고, 영조 때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황해도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선교랑(宣敎郞)신응하(申應河)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두었다. 3남 송민(宋旻)은 영릉(寧陵)참봉(參奉)을 지냈으며, 그 손자 송국경(宋國經)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을 지냈고, 송국위(宋國緯)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도곡집(陶谷集)』
  • 『약천집(藥川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