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인(傔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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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나 부호의 집에서 잡무를 맡아보던 사람.

개설

겸인(傔人)은 양반이나 부호의 집에서 시중드는 하인을 말하지만 그 역할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청지기 정도의 역할을 하였지만 조선후기 경화거족(京華巨族)이 대두하여 겸인은 서리 일을 대신하면서 사회적 성장을 하였고, 독특한 계층으로 존재했다. 겸인은 주인의 공사(公私) 생활에 늘 수종하였고, 주인-겸인의 관계를 대물림하기도 했다. 겸인은 유교적 소양과 서리 직무에 필요한 문한(文翰) 능력을 가지고 주인과 부자간의 의리가 있다고 표방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사(士)를 자처하게 되면서 주인-겸인 관계는 변하였다. 경화거족은 각종 업무에서 겸인에게 의존하는 대신 겸인을 보호하였다. 결국 겸인은 부패한 사회 체제에 편승하거나 부패를 조장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 겸인은 집안에서 수령의 잔심부름을 맡아보던 사사로운 종으로 양반가나 부호의 집 잡무를 맡아보던 사람을 통칭한다. 승차(承差) 또는 청지기라고도 불렸다. 겸속(傔屬), 시종(侍從), 종노(從奴), 구종(驅從), 청지기[廳直], 창두(蒼頭) 등으로도 기록되었으며, 주인의 위상에 따라 그 역할은 다양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집 수청방(守廳房)에서 집안의 잡일을 하거나 시중을 들던 하례에 불과하였다. 겸인들은 주인이 출타하면 호위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국난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는 주인과 함께 순절하여 겸인을 포상(褒賞)하고 널리 기리기도 했다. 숙종이 겸인 신여로(申汝櫓)를 동래의 충렬사에 배향하게 한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반면에 겸인은 주인을 위해 부정한 일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주인의 죄에 연루되어 부당한 형벌을 받아 죽는 경우도 많았다.

겸인은 주인의 자제를 위해 과장(科場)에 난입하기도 하고, 주인의 위세를 빌려 뇌물을 받거나, 평민에게 명목 없는 돈을 거두면서 침학하기도 했다. 상전의 귀와 눈을 가리는 짓을 일삼으면서 간사한 소인과 가까이 지내며 화단(禍端)을 빚었고 변란을 일으켜 여론이 들끓게 했다. 이러한 겸인의 사례가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등장한다.

변천

1) 주인-겸인의 관계와 위상 변화

겸인은 조선후기 경화거족의 대두와 함께 향리가 맡았던 서리 일을 대신하게 되면서 꾸준한 사회적 성장을 거쳤다. 18~19세기에 이르면 겸인은 서울의 독특한 계층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들은 종래의 노비나 하인과 달리 문하인, 문객 등으로도 불리면서 양인층으로 서울의 문벌가에 임의로 투속하여 주인-겸인 관계를 맺었다. 겸인은 주인의 재산 관리는 물론 주인 집안의 대소사 일체를 맡아 처리하였다. 주인의 공적·사적 생활에 늘 수종하였고, 심지어 주인-겸인의 관계를 대물림하기도 하였다. 겸인은 주인이 지방관으로 갈 때 책방(冊房), 책객(冊客), 중방(中房) 등의 역할로 주인을 따라가 지방관아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실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주인의 사행(使行) 등을 따라가 주인을 수종하기도 했다.

겸인은 주인의 권세를 이용하여 중앙 관청의 하급직 서리가 되는 것을 가장 선호했다. 겸인의 서리 진출은 각 당상관 개인에게 수종하도록 이미 법전에 규정되어 있었던 이른바 배서리(陪書吏) 관례가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은 경화거족의 겸인으로서, 중앙 관서의 서리로서 직무에 필요한 문한 능력의 기초는 가지고 있었다. 주인집에 거주하면서 주인의 자제들이나 친우들과 어울리면서 문필을 익혔고, 주인집 자제의 과거 시험에서 대필하기도 했다. 심지어 경화거족의 지식인들과 직접 시를 주고받으면서 ‘시겸(時傔)’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겸인도 사대부적인 교양과 의식, 정서 그리고 그 표현 능력을 공유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독자적인 통혼권(通婚圈)을 형성하고, 업무상의 접촉을 통하여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강한 영향력을 나타냈다.

경화거족의 겸인은 그 수가 적지 않아 많은 경우 30명에 이르기도 했고, 몇 대를 걸쳐 겸인을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겸인과 주인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끈끈했다. 주인과 겸인의 주겸 관계는 유교적 윤리로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형화하였다. 주인과 겸인 간에는 부자지의(父子之義)와 같은 의리, 유교적 원리가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때로는 군신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으로 인정하고, 또 그러한 관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한 실례(實例)는 경화거족의 문집이나 위항인물지 등에 실려 선양되고 또 미담으로 전해졌으며, 이 과정에서 주겸 관계는 세습되었다.

겸인 측은 주인의 정치적 영달이 곧 자신들의 서리 진출의 관건이었다. 또 서리 진출은 자신과 자기 가문의 경제적 성장, 나아가서는 이를 발판으로 한 신분 상승의 계기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겸인은 주인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다. 경화거족 측에서도 겸인은 불가결한 존재였다. 경화거족의 살림살이는 가문의 영달과 함께 커질 대로 커져 살림살이를 수완 있게 다루는 능력과 경험을 갖춘 겸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특히 문벌가의 주인이 중앙 정권에 참여할 때 그들의 겸인은 중앙 관청의 요로에 서리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 수집이나 연락 등 문벌가의 가세 유지를 위해서도 겸인의 존재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2) 겸인의 변화와 한계

19세기 겸인들은 경화거족들과 함께 서울 생활을 하였고, 사상적으로도 유교적 교양에 입각하여 주인이 속한 사족들과 같은 취향이나 의식 세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의식(士意識)을 표방하기도 하는 등 주인과 유사한 생활양식을 보였다. 이들은 점차적으로 사(士)를 자처하였고 사족의 의식과 윤리를 지향하면서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주겸 관계는 변했다.

겸인의 서리직 획득과 유지가 경화거족 주인의 비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그 비호 속에 그들과 함께 존재했다. 겸인과 서리 층이 가지는 경화거족에 대한 일관된 의존성은 전통 사회 체제와 결부되어 겸인들의 결정적 한계가 되었다. 경화거족과 겸인은 함께 부패한 사회 체제에 편승하거나 흔히 그 부패를 조장하기도 했다. 실례로, 임오군란의 한 원인이었던 군료(軍料) 부정은 바로 선혜청 당상민겸호의 겸인으로서 선혜청 고리(庫吏)였던 자가 저지른 일이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연조귀감(掾曹龜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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