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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0: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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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무복 |
한글표제 | 무복 |
한자표제 | 舞服 |
관련어 | 무동복(舞童服), 무무(武舞), 문무(文舞),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의복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대~조선 |
집필자 | 윤양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무복(舞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5년 9월 29일, 『태종실록』 16년 6월 5일, 『세종실록』 12년 12월 15일, 『세종실록』 13년 6월 29일, 『세종실록』 13년 8월 9일, 『세종실록』 15년 3월 22일, 『세종실록』 15년 3월 22일, 『세종실록』 21년 7월 1일, 『세종실록』 7년 9월 17일 |
제의(祭儀)나 연향(宴享)에서 무자(舞子)가 춤출 때 입는 옷.
개설
고대 국가의 의례에서 춤은 악(樂)과 더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무(舞)는 악에 속해 있으면서도 음악에 따라 움직임이나 그 움직임의 방향에 의해 음악보다는 더욱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악무(樂舞)는 부족국가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부족마다의 제천(祭天) 행사에는 반드시 음악과 무용이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원 및 변천
삼국시대의 무복(舞服)과 관련한 기록은 중국 역대의 제도를 통관(通觀)한 『통전(通典)』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춤추는 사람, 곧 무자와 관련한 부분이 나오는데, “상투를 뒤로 틀고[椎髻於後] 붉은 수건[絳抹額]을 이마에 동여맨 채 금고리[金鐺]를 장식한 4명 중 2명은 황색의 치마와 저고리, 적황색 바지를 입고, 나머지 2명은 적황색 치마와 저고리, 바지를 입었는데, 그 소매가 매우 길고 검정색 가죽신을 신었으며 쌍쌍이 서서 춤을 춘다.”고 적고 있다. 무용총 벽화의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백제의 무복에 대해서는, 무자 2명이 자색(紫色)의 소매가 크고 긴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皮履]을 신는다고 하였다. 신라의 무자 2명은 방각복두(放角幞頭)를 쓰고 자색의 대수포(大袖袍)인 난삼(襴衫)에 홍정도금과대(紅鞓鍍金銙帶)를 차고 오피화(烏皮靴)를 신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삼국의 무복을 비교해 보면 공통으로 저고리의 소매가 크고 길며, 옷의 빛깔은 고구려는 황색과 적황색, 백제와 신라는 자색을 쓰고 있다. 신은 고구려와 신라는 신목이 있는 화(靴)를 신는 반면에 백제에서는 신목이 없는 이(履)를 신었다.
고려시대에는 당악정재(唐樂呈才)와 향악정재(鄕樂呈才)가 구체적으로 구분되어, 전대에 비해 다양한 악무(樂舞)가 연희되었다. 고려시대 악무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송나라 희령(熙寧) 연간에 고려문종이 악공을 청한 데 이어 국가의 공식 행사에 사용되는 음악인 대성아악(大晟雅樂)과 연회에 사용되는 음악인 연악(燕樂)을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면서부터이다.
고려의 음악은 양부(兩部)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왼편에는 당악(唐樂)을, 오른편에는 향악(鄕樂)을 연주하는 것이다. 이때 향악은 주로 이(夷)의 음악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이만융적(夷蠻戎狄)의 악무가 유입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말악(靺樂)으로, 말악 역시 노래와 연주, 춤이 합쳐져서 연희된다.
고려시대 악무는 대악사(大樂司)에 260명, 관현방(管絃坊)에 170명, 경시사(京市司)에 300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자지무(柘枝舞)와 포구악(抛毬樂)과 같은 기예도 있다고 하였는데, 자지무 또한 북위(北魏)의 춤이었다.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당시의 무복에 대한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고려의 악무를 바탕으로 궁중정재(宮中呈才)와 연향의 악무가 형성, 발전되었다고 했으므로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 설명하고 있는 무복과 유사한 형태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무복은 실록을 통해 제도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알 수 있다. 또한 의궤 기록과 도식, 『악학궤범』을 통해 무복의 형태와 치수, 색, 재료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 수 있다.
형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무복의 형태를 살펴보면, 1405년(태종 5) 9월 예조에서 무대(舞隊)의 관복색을 채화복두(綵畫幞頭)·청포(靑袍)·각대(角帶)·조화(皂靴)로 상정하였는데, 모두 홀(笏)은 없었다(『태종실록』 5년 9월 29일). 1416년(태종 16) 6월에는 예조에서 기우계목(祈雨啓目)을 올렸는데. 『문헌통고(文獻通考)』의 내용을 참고로 북교(北郊)에 망기(望祈)할 때와 풍운뇌우·삼각산·한강·목멱·사직·종묘·우사(雩祀)·기우사(祈雨祀)에 대우(大雩)할 때 14명의 무동(舞童)이 모두 현의(玄衣)를 입고 8열로 서서 각각 우예(羽翳)를 잡고 열마다 운한시(雲漢詩)를 노래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6년 6월 5일).
1430년(세종 2) 12월에는 예조에서, 옛 제도를 참조하여 아악을 연주하는 악공의 옷과 신 등에 대해 조사하여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복색에 대해 조회 때 아뢰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참고로 예조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당·송의 제도를 알 수 있다(『세종실록』 12년 12월 15일).
당의 제도를 보면, 아악과 당악의 문무는 64명으로, 교제(郊祭)와 종묘에서는 위모관(委獏冠)을 쓰며, 현사포(玄絲布)로 지은 대수(大袖)와 백련포(白練布)로 지은 영표(領褾), 백사포(白紗布)로 지은 중단(中單), 붉은색의 목수건[絳領褾], 붉은 베로 지은 통 넓은 바지[大口袴]에 가죽 띠와 검정 신에 흰 베로 지은 버선[白布襪]을 신는다고 했다. 무무도 64명인데, 교제와 종묘에서는 평면(平冕)을 쓰고 나머지는 문무와 같다.
대궐 뜰에서 연주할 때에는 무변(武辯)과 평건책(平巾幘)에는 금지(金支)로 장식하며, 비사포(緋絲布)로 지은 대수(大袖), 양당(裲襠)의 갑옷[甲衣], 백련포(白練布)로 지은 저고리[襠], 비단에 등사(騰蛇) 무늬를 수놓은 기량대(起梁帶), 표범 무늬로 수놓은 통 넓은 베바지에 검정 베신[烏布鞋]을 신는다고 하였다.
송의 제도를 보면, 대조회(大朝會)에서는 악공은 흑개책(黑介幘)을 쓰며, 휘(麾)를 잡은 사람[執麾人]은 평건책(平巾幘)을 쓰고, 모두 비수난삼(緋綉鸞衫)과 백견(白絹)으로 지은 협고(裌袴)와 말대(抹帶)를 착용한다. 인문무두(引文舞頭)와 문무랑(文舞郞)은 모두 진현관(進賢冠)과 황색 난삼(鸞衫), 은빛 갈군(褐裙), 녹색 저고리[綠襠], 가죽띠[革帶]를 띠고 검정가죽신[黑皮履]을 착용한다.
인무무두(引武舞頭)와 무무랑(武舞郞)은 모두 평건책을 쓰고, 비색(緋色)의 난삼, 황화갑신(黃畫甲身), 자색 저고리[紫襠], 표범 무늬를 수놓은 통 넓은 바지와 기량대(起梁帶)에 검정가죽신을 신는다. 악정(樂正)은 붉은 공복[絳公服]에 방심곡령(方心曲領), 비백대대(緋白大帶), 금동혁대(金同革帶)와 검정가죽신을 착용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은 다만 물품의 명칭으로만 전할 뿐 그 제도를 상세히 알 수 없어, 조회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공인(工人)의 관복 제도에 따라 모두 난대(襴帶)를 만들어 사용하게 하였다.
이어 1431년(세종 13) 6월에는 회례연에 참가하는 문무인의 수를 정하였는데, 가인(歌人) 34명과 문무인·무무인이 각각 48명이고, 나이가 20세 전후한 자로 영리하고 얼굴이 아름다운 이들을 골라서 정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3년 6월 29일). 같은 해 8월에는 박연(朴堧)이 회례연에 쓰일 남악과 관복의 그림을, 당나라 경운지무(景雲之舞)의 녹운관(綠雲冠)·화금포(花錦袍)와, 성수지무(聖壽之舞)와 해홍지무(解紅之舞)의 금동관(金銅冠)·화봉관(花鳳冠), 오색화의(五色畫衣)·자비수유(紫緋繡襦)·용지지무(龍池之舞)의 부용관(芙蓉冠) 및 오색운의(五色雲衣) 등을 모방하여 그리고 아울러 속체(俗體)의 세 모양을 그려서 올렸다(『세종실록』 13년 8월 9일).
이에 왕이 경운(景雲)·용지(龍池) 등의 무복을 쓰라고 명하고, 인하여 다섯 가지 채색(綵色)을 써서 모형 의상[見樣衣裳]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또한 박연이 당나라의 운금(雲錦)과 화금(花錦)을 본떠 채색 비단에 회례 남악의 무동의 관복을 그려서 올리자, 왕이 관과 의복을 무동의 수효대로 갖추어 만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에 남악의 관복과 무동들의 옷이 새로이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33년(세종 15) 3월에는 박연이 제악(祭樂)에 쓰일 관복의 제도를 올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상·당하의 여러 악공의 관(冠)을 종래의 흑포두건(黑布頭巾)에서 개책관[介幘]으로 고치고, 현재 입고 있는 오승포의(五升布衣)는 송조(宋朝) 묘악(廟樂)의 제도에 의해 난삼으로 고쳐 쓰되, 구승(九升)의 명주를 쓰도록 요청하였다. 또한 문무에서 쓰는 관은 진현관으로 바꾸고, 무무의 관은 피변(皮弁)으로 바꾸도록 요청하였다(『세종실록』 15년 3월 22일).
무인(舞人)과 공인(工人)의 복색에 대해서는 현재 문무 및 여러 악공이 제사에는 모두 붉은 빛을 쓰고, 무무(武舞)에는 검은색을 쓰던 것을 인귀(人鬼)에게 제사할 때에는 비수난삼[綉鸞衫]을 쓰고, 회례(會禮)의 천신(天神)을 제사할 때에는 검은색을 쓰고, 지신(地祗)을 제사할 때에는 황색을 쓰도록 요청하였다.
대(帶)의 경우 제악(祭樂)의 무인 및 당하의 여러 공인이 정해진 대가 없어 임시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가는 끈을 매고, 당상의 공인만이 추포(麤布)로 만든 홀띠[單帶]를 띠고 있지만, 이것도 친향대제(親享大祭)에만 쓰고 나머지 제사에는 쓰기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므로 제악(祭樂) 안의 악정(樂正)·악사(樂師)·운보인(運譜人)·무인 등의 띠를 모두 가죽띠로 하고, 또 당상의 등가공인(登歌工人) 및 당하의 여러 공인의 띠는 송나라에서 쓰는 말대(秣帶)를 쓸 것을 요청하였다. 여기에 제악(祭樂)에 신는 신은 옛 그림에 의하여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박연의 상소는 1433년(세종 15) 당시 악무의 복식과 관련한 정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세종실록』 15년 3월 22일). 이에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는 공인의 수가 많고 새롭게 각색의 옷을 갖추자면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무복은 모두 검은색을 입고, 공인은 모두 붉은 옷을 입게 하며, 악정(樂正)인 협률랑(協律郞)은 제복(祭服)을 입고, 악사(樂師)는 비공복(緋公服)을 입게 하였다.
한편, 무동은 동련화관(銅蓮花冠)을 쓰고 백색의 명주로 만든 중단(中單)을 입은 다음 그 위에 홍초(紅綃)로 안을 댄 황(黃)·녹(綠)·자(紫)·남(藍)·도홍(桃紅)의 상의를 입고 홍단(紅緞)으로 만든 상(裳)을 입고 오피화를 신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동들의 옷은 여러 가지 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439년(세종 21) 7월의 기록을 보면, 무동은 계절에 관계없이 사라(紗羅)로 옷을 만들어 여름에는 덥고 또한 토우(土雨)와 비로 더러워지면 퇴색될 뿐 아니라 다시 염색하는 것이 어려운데, 여기에 더하여 사라는 중국에서 들여와 충당해야 하므로 여름용 무복으로 흰 모시에다 오색 물감을 들여서 만들게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세종실록』 21년 7월 1일).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결국 1748년(영조 24) 7월 칙사의 연향 때는 무동의 관복에 문단(紋緞)의 사용을 금지하는 금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세종 연간에 박연의 악무(樂舞)에 대한 상소 내용은 『악학궤범』의 기초가 되면서 조선시대 무복의 기본이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 의궤의 도식부에 그려져 있는 무복은 정재(呈才)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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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민속 관련 사항
1425년(세종 7) 9월의 기사에 곡파무(曲破舞)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세종실록』 7년 9월 17일). 곡파무는 당악(唐樂)이며 여악(女樂)인데, 죽간자(竹竿子)와 무기(舞妓) 각 두 사람이 풍악과 박(拍)에 맞추어 구호(口號)와 가사를 부르며 대무(對舞) 혹은 배무(背舞)를 하면서 추는 춤이다. 당시 이 무악(舞樂)이 오랫동안 연주되지 않아서 기억하는 자가 없었는데, 두 기생이 악곡(樂曲)을 잊지 않고 있어서 늙은 기생 봉이(鳳伊)에게는 채견(綵絹) 2필과 쌀 5섬을, 종가(終加)에게는 채견 2필과 쌀 10섬, 콩 5섬을 왕이 내려주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도경(高麗圖經)』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종임인년진연의궤(高宗壬寅年進宴儀軌)』
- 『순조기축진연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악학궤범(樂學軌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