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포(麤布)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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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추포 |
한글표제 | 추포 |
한자표제 | 麤布 |
동의어 | 상포(常布), 조량목(助粮木), 함산포(咸山布) |
관련어 | 오승포(五升布), 오종포(五綜布) |
분야 | 경제/물가·화폐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유현재 |
용도 | 화폐, 옷감 |
재질 | 마(麻), 저(苧), 면화(棉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추포(麤布)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3년 9월 12일 |
고려말과 조선시대에 유통된 품질이 낮은 직물.
개설
의복의 재료로 고려시대에는 삼베인 마포(麻布)와 모시인 저포(苧布)가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무명인 면포(綿布)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들 섬유는 수확과 직조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물품 가치도 상당히 높았다. 고려말 면화가 보급되면서 조선 세종 이후 전국적으로 면포 사용이 확대되었다. 면포는 옷감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품질을 갖춰야 했고 관에서도 낮은 품질의 면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조선시대에 이르면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그 기준에 맞지 않는 면포를 통칭하여 추포 혹은 상포(常布)라고 규정했다.
연원 및 변천
마포나 저포 그리고 면포는 각각 일정한 길이의 섬유를 씨줄과 날줄로 얽어 만든 직물을 말한다. 고려말까지는 마와 저를 재료로 직조한 마포와 저포가 유통되었고 공민왕대 이후 문익점(文益漸)이 한해살이 면화를 들여와 재배에 성공하면서 면포가 널리 확산되었다. 마포와 저포 그리고 면포는 일정한 품질 기준에 따라 제작되어야 의복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고려말부터 세금으로 납부받는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 고려말의 경우 길이에 대한 규정은 확인할 수 없고, 날줄의 가닥수가 400개 이상인 오승포(五升布) 혹은 오종포(五綜布)에 대한 기준만 마련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면포가 다른 포화(布貨)를 대신했는데 세종대의 경우 고려와 마찬가지로 오승포를 세납하는 직물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후 성종대에 날줄의 가닥수 외에 세로 길이를 35자(약 11m)로 정하면서 정포(正布)의 기준이 마련되었다. 즉, 포의 촘촘함은 5승으로, 길이는 35자, 너비는 7치(약 21㎝)에 해당해야만 세금으로 받아들였다.
추포는 위에서 언급한 품질에 못 미치는 직물을 이른다. 물론 품질이 아주 뛰어난 직물과 단순하게 대비시켜 추포로 지칭한 경우도 있지만 마포나 면포 등을 세금으로 활용하면서 세금으로 활용되는 직물에 못 미치는 품질인 경우 추포로 통칭하게 되었다. 상포(常布)도 비슷한 맥락에서 형성된 명칭으로 추포와 같이 혼용되기도 한다. 상포는 세납용이 아닌 일상생활에 사용되거나 민간에서 거래되는 교환수단용 직물을 이르는 말로 법정 규격을 갖추지 않거나 품질이 열악한 직물을 추포와 함께 이르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추포나 상포처럼 보통명사로 굳어진 명칭 외에도 생산된 지역과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는 규격 미달의 포화를 이르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조량목(助粮木)이나 함산포(咸山布)가 있는데, 조량목은 요역제가 대립제(代立制)로 바뀌면서 나타난 추포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초기에 백성들은 요역에 직접 동원되었지만 조선중기 이후 점차 직접 요역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대립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은 직접 요역에 동원되는 승려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주고 요역을 대신 서도록 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파견되어야 하는 요역의 경우 17세기 이후에는 대부분 승려들이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상경한 승려들은 요역을 마치는 기간 동안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영조대 등장하는 조량목은 지방의 승려들이 서울에서 식량과 교환하기 위해 가지고 왔던 낮은 품질의 면포를 말한다. 함산포는 함산에서 생산된 직물을 지칭한다. 조선후기 면화의 재배 지역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면화 재배에 적절하지 않은 함산에서 면화가 재배되다 보니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함산에서 생산된 면화로 직조한 면화를 추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년 9월 12일).
즉, 추포는 특정한 재질과 품질을 보이는 직물을 지칭하고, 좁은 범위로는 관에서 정한 일정 품질 기준에 못 미치는 직물을 통칭한다. 추포는 직물이 세금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주로 관에서 규정된 것으로 동전 유통이 활발하게 나타난 조선후기까지 민간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형태
면포는 세로줄인 씨줄과 가로줄인 날줄을 베틀을 통해 얽어 만들었다. 면포의 품질을 나타내는 단위인 ‘1승’은 80가닥의 씨줄을 나타내며 법정 규격 면포는 5승으로 총 400개의 씨줄로 이뤄져 있다. 조선중기 이후 세금으로 바치는 직물 기준에 못 미치는 다양한 재질의 섬유를 추포로 통칭하고 있다. 세금으로 받아들이는 법정 면포의 가격이 쌀로 환산할 경우 큰 흉년을 제외하고 1필당 4~8두 사이로 매우 높은 가격이었다. 따라서 민간에서 백성들은 소액거래를 위해 짧게 면포를 자르거나 성글게 직조하여 결제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낮은 품질의 직물이 관의 입장에서는 추포로 분류되기도 했다. 이 밖에 재직조를 염두에 두고 법정포의 길이만 준수한 채 씨줄과 날줄의 가닥수를 현저하게 낮춘 직물도 거래되었다. 이 경우 주머니로 만들어 사용할 경우, 주머니에 넣은 콩이 빠져나와 활용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저열한 품질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면포는 면화가 확대 보급되면서 널리 사용되었지만 면화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일시에 투입되어야만 했다. 직조 과정에서도 씨앗을 제거하고 실로 만들어 베틀을 이용하여 면포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면포는 상당한 고가의 제품이었다. 이에 민간에서는 세금으로 납부하는 면포 외에 일상에서 활용할 때는 품질이 조금 떨어지는 추포 직물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은 세금을 납부하기 위한 면포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기준 미달의 추포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권인혁, 『조선시대 화폐유통과 사회경제』, 경인문화사, 2011.
- 박평식, 「조선초기의 화폐정책과 포화유통」, 『동방학지』15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2.
- 송재선, 「16세기 면포의 화폐기능」,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 유현재, 「16세기 추포유통과 그 성격」, 『한국사론』,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