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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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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소세량 |
한글표제 | 소세량 |
한자표제 | 蘇世良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학자/과학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원우(元佑) |
호 | 곤암(困菴), 병암(屛巖)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76년(성종7) |
사망 | 1528년(중종23) 1월 23일 |
본관 | 진주(晋州) |
주거지 | 전라도 익산(益山) 길내(道川: 도내골) |
묘소소재지 | 전라도 익산(益山) 회룡봉(回龍峰: 용화산) |
증조부 | 소희(蘇禧) |
조부 | 소효식(蘇效軾) |
부 | 소자파(蘇自坡) |
모_외조 | 개성왕씨(開城王氏): 왕석주(王碩珠)의 딸 |
형제 | (동생)소세공(蘇世恭), 소세검(蘇世儉), 소세양(蘇世讓), 소세득(蘇世得) |
처_장인 | 남원양씨(南原楊氏): 양배(楊培)의 딸 →(자녀)4남 |
자녀 | (1자)소지(蘇遲) (2자)소연(蘇連) (3자)소봉(蘇逢) (4자)소경(蘇逕) |
저술문집 | 『병암집(屛巖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소세량(蘇世良) |
총론
[1476년(성종7)∼1528년(중종23) = 53세]. 조선 중기 연산군~명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 · 병암(屛巖)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세거지는 전라도 익산(益山)이다. 아버지는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소자파(蘇自坡)이고, 어머니 개성왕씨(開城王氏)는 왕석주(王碩珠)의 딸이다. 한성부 판관(判官)소효식(蘇效軾)의 손자이고, 좌찬성(左贊成)소세양(蘇世讓)의 중형이다.
연산군 시대 익명서 사건
1496년(연산군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서울 명문 집안의 자제들과 교유(交遊)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21세였으나, 그 뒤에 10여 년이 지나도록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1504년(연산군10) 셋째 동생 소세양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자 두 형제가 함께 서울 생활을 하였다. 연산군이 폭정을 자행하여 점차 피해자가 늘어나자, 이름을 숨기고 이를 비방하는 글이 많이 나붙었는데, 이것이 <익명서(匿名書)> 사건이다. 일반 서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벽서(壁書)에 언문(諺文: 훈민정음)을 많이 사용하였으므로, 연산군은 언문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1506년(연산군12)에 소세량 형제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붙잡혀 갔는데, 심하게 곤장을 맞으면서 심문을 당하고 서울에서 추방당하여 고향 익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두 사람은 정거(停擧)당하여, 과거시험을 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되었다. 연산군은 잇달은 <익명서>가 바로 역적(逆賊)으로 내몰려 죽음을 당한 자의 친족들의 소행이라고 믿고 참혹한 형벌을 썼는데, 연산군 말기 <익명서> 옥사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형벌을 당한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서 연산군이 쫓겨나자, 소세량 형제는 서울에 올라와서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1507년(중종2) 소세량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 동생 소세양도 2년 뒤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초사(初仕)로서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여러 참하(參下)의 관직을 거쳐, 1510년(중종5)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는데, 1514년(중종9)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516년(중종11) 천문학의 인재를 키우기 위하여 천문 이습관(天文肄習官) 15명을 선발하였는데, 그를 비롯하여 홍언필(洪彦弼) · 성세창(成世昌) · 이언호(李彦浩) · 임추(任樞) · 정사룡(鄭士龍) · 유돈(柳墩) · 신광한(申光漢) · 박세희(朴世憙) · 조광조(趙光祖) · 장옥(張玉) · 황효헌(黃孝獻) · 기준(奇遵) · 정응(鄭應) · 이충건(李忠楗) 등으로 모두 당대의 재사(才士)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1516년(중종11) 정언(正言)윤자임(尹自任: 중종의 국구)에게 논박을 당하여,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여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고 행정을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4년 후에 다시 홍문관 수찬으로 소환되었다.
1520년(중종15)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홍문관 응교(應敎) ·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고, 1522년(중종17)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1523년(중종18)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는데, 그때 동생 소세양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있다가, 황해도관찰사로 나간 직후였다. 1524년(중종19)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서 여막 살이를 하다가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상했다. 1526년(중종21)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자청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아픈 몸으로 송사(訟事)를 판결하다가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1528년(중종23) 1월 23일 죽으니, 향년이 53세였다.
저서로는 『병암집(屛巖集)』 · 『곤암집(困菴集)』 등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소세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공부를 하였는데,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자 더욱 의지가 굳어져 학업에 분발하였다. 잠시도 글을 송독(誦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잠을 자지 않으려고 이불을 펴지 않았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피곤해질 때에 턱을 괴고 잠깐 졸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經) · 사(史) · 자(子) · 집(集)은 물론이고, 소설(小說)과 불교 서적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사서(四書) · 삼경(三經)도 막힘없이 줄줄 암송하였다. 붓을 들고 문장을 쓰면, 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것처럼 이어졌고, 시(詩)도 내용이 풍부하고 문장이 화려하였다. 그는 평생 책을 즐겨 읽었으며, 덕으로써 자제들을 인도하고 가르쳤는데, 그보다 10세 아래인 셋째 동생 소세양(蘇世讓)이 문학으로 이름이 난 것도 그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는 효우(孝友)하려는 마음이 나이가 들수록 두터웠는데, 전라도 창평(昌平)에 사는 4촌 누이를 항상 도와주었다. 그런데 창평 사람 유옥(柳沃)이 공공연히 두 사람이 간통한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파되었다. 1516년(중종11) 그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사간원 정언윤자임(尹自任: 중종의 국구)이 이것을 논박하여, 그는 용담현령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고(誣告)인 것이 밝혀져서 1520년(중종15) 홍문관 수찬으로 다시 소환되었다.
비문과 후손
묘소는 전라도 익산(益山) 북쪽 회룡봉(回龍峰: 용화산)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되었다. 그의 동생 좌찬성(左贊成)소세양(蘇世讓)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익산(益山)의 남촌서원(南村書院) ·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남원양씨(南原楊氏)는 충순위(忠順衛)양배(楊培)의 딸인데, 자녀는 4남을 두었다. 차남 소연(蘇連)은 무과에 급제하여,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냈고, 3남 소봉(蘇逢)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병암집(屛巖集)』
- 『곤암집(困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묵재집(默齋集)』
- 『충재집(冲齋集)』
- 『양곡집(陽谷集)』
- 『간재집(艮齋集)』
- 『창계집(滄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