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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6 판




총론

[1556년(명종 11)~? = ?].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좌랑(佐郞)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성중(誠仲)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직장(直長)박여헌(朴黎獻)이고,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이희백(李希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전적(典籍)을 지낸 박유(朴瑜)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목사(牧使)를 지낸 박영창(朴永昌)이다. 첫째 부인 김씨(金氏)는 김요명(金堯命)의 딸이고, 둘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허명(許銘)의 딸이다.

선조~ 광해군 시대 활동

선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봉사(奉事)가 된 후 1595년(선조 28)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599년(선조 32) 6월 형조 좌랑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00년(선조 33) 1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2년 6월 14일, 선조 33년 1월 10일] 그리고 그 해 3월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4월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8월에는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3년 3월 28일, 선조 33년 4월 8일, 선조 33년 8월 8일] 이어 1601년(선조 34) 12월에는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는데, 이때 아문(衙門)에 나가 정무를 처리하지 않았으므로 아전(衙前)들이 이를 이용하여 간사한 짓을 하였다고 한다.[『선조실록』선조 34년 12월 20일, 선조 37년 10월 1일] 1605년(선조 38) 10월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8년 10월 19일, 선조 38년 12월 10일] 이때도 근무를 할 때 간사한 서리에게 정사를 위임함으로써 많은 폐단이 백성에게 미쳤기 때문에 1607년(선조 40) 4월에 결국 파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40년 4월 1일]

1617년(광해군 9) 11월에는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으로 있었으며, 1618년(광해군 10) 제용감(濟用監)정(正)으로 인목대비의 폐비를 요청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9년 11월 25일,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