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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9 판




총론

[1435년(세종 17)∼1503년(연산군 9) = 69세.] 조선 전기 세조∼연산군 때 활동한 문신.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지냈다. 자(字)는 희점(希點)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삼척 부사(三陟府使)윤계흥(尹繼興)이고,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이승손(李承孫)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윤인경(尹仁鏡)이 그의 손자이다.

세조 ∼ 성종 시대 활동

1456년(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다. 11년 뒤인 1466년(세조 12) 32세의 나이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가 되었고, 1472년(성종 3)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년 2월 20일, 3년 4월 19일] 간원으로서 불교에 관하여 성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그해 6월 그는 “방호련(方好連) 등 3천여 명이 무리를 지어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불공을 드렸으며, 덕원군(德源君)이서(李曙) · 창원군(昌原君)이성(李晟)도 참여하였습니다. 방호련 등을 추국(推鞫)하고 있는데, 청컨대 이들을 가두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성종은 “옥(獄)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데 3천여 명을 가두려고 하느냐? 더구나 임금을 위하여 불공을 한다고 일컫는 사람들을 억지로 가두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7월에는 “신륵사(神勒寺)를 중수한다 하는데, 요새 가뭄과 흉년이 해마다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득이한 역사(役事)가 아니니, 청컨대 정지(停止)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신륵사는 선왕을 위한 일이라며 정지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근간인 억불 숭유(抑佛崇儒) 정책과 세종 말년부터 다시 시작된 숭불 정책 사이에서 유학의 도를 익힌 관료의 고민이 엿보인다.[『성종실록』성종 3년 6월 7일 · 7월 16일]

그는 당시의 최고 권력자에 대해서도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1472년(성종 3)에 그는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한명회(韓明澮)는 지금 진휼사(賑恤使)로 경기에 가서 순찰하는데, 말을 탄 종자(從者)들을 비록 간소하게 한다고 하지마는 역마(驛馬)가 거의 20여 필에 이르니 역마다 소연(騷然)합니다. 청컨대 불러서 돌아오게 하소서.”라고 간언하였다.(『성종실록』 성종 3년 8월 9일) 이후, 예조 좌랑(左郞)과 형조 좌랑을 거쳐서 진주 판관(晉州判官)에 임명되었다. 이어 공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나갔다가, 종부시(宗簿寺)첨정(僉正)이 되었다. 이후 승문원 참교(參校)로 승진되었고, 사복시(司僕寺)부정(副正)에 임명되었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6년(연산군 2)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연산군이 생모 윤씨(尹氏: 제헌왕후)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모시려고 하자 그해 8월 윤석은 “윤씨는 묘(墓)를 옮겼으므로, 명절과 삭망(朔望)에 다 제사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반드시 신주와 사당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3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바꾸지 않아야 효도라 할 수 있다.’하였으니, 지금 3년 안에 어찌 급급히 폐비를 위하여 따로 신주와 사당을 세우십니까?” 하였다. 이어 9월 에는 “다만 묘의 퇴락한 곳을 수리한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목석(木石)을 실어 나르니, 신 등은 크게 영건(營建)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또 말하기를, ‘천친(天親)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천변(天變)과 관계되느냐.’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부왕(父王)도 천친이라고 생각하는데, 급하게 유교(遺敎)를 어기고 사사로이 사당과 신주를 세우며, 소인(小人)을 함부로 품계로 올리고 인륜을 어지럽힌 사람들을 불문에 부치니, 신의 의견으로는 천변(天變)이 일어나는 것이 여기에 연유한 것인가 합니다. 신 등의 말을 들으시어 여망에 부응(副應)하소서.”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사직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14일 · 9월 15일] 이후, 사도시(司導寺) 정(正)을 거쳐서,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사복시 정과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를 지냈다. 1503년(연산군 9) 69세로 세상을 떠났다.[『도곡집(陶谷集)』 권13 「사간원 사간 윤공 묘갈명(司諫院司諫尹公墓碣銘)」]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문제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는데, 6월에 윤석은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그는 사간원 사간으로 재임했던 당시, 연산군이 윤씨를 위하여 신주와 사당을 세우는 일을 반대하였다. 그는 윤씨를 위하여 신주와 사당을 세우고 품계를 올리는 일이 인륜을 어지럽히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이 과정에서 폐비 윤씨를 소인(小人)에 비유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6월 19일) 그가 당한 참혹한 형벌은 사간원 사간 시절에 올린 상소문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중종 즉위 후, 이조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성품과 일화

윤석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빼어나고 남달라 배움에 힘썼고,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근신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재산 관리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 언제나 거문고와 바둑 · 책 · 그림을 즐겼다. 정운(正韻)의 자법(字法)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오래도록 승문원(承文院)에 몸담았다. 평소에 사가(史家)로서 갖추어야 할 삼장(三長)의 재주, 즉 재지(才智)‧ 학문(學問) ‧식견(識見)을 지니고 있어 오랫동안 사직(史職)을 겸하였다.[『도곡집』 권13 「사간원 사간 윤공 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양주군(楊州郡) 송산리(松山里)에 있고,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권13 「사간원 사간 윤공 묘갈명(司諫院司諫尹公墓碣銘)」] 중종 즉위 후,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인 청주 경씨(淸州慶氏)는 병조 참판경여(慶餘)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1남 윤인저(尹仁著)는 현감이고, 2남 윤인복(尹仁復)은 군수이다. 딸은 부사한순(韓巡)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도곡집(陶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