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火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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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화약을 이용하여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던 무기의 일종.

개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화약을 이용하여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를 일컫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쓰였다. 이후 화통이라는 용어는 점차 세분화하여 총통, 화포, 총 등과 같이 구체적인 명칭으로 구분하여 불렸다.

연원 및 변천

화통이라는 용어는 고려 말~조선초기에 등장한 용어이다. 이러한 화약 무기의 제조는 화약 제조기술의 도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4세기에 고려는 끊임없이 침탈하는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구를 압도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 체계가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다량의 화약과 화기를 제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화약과 화기의 자체 생산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시 국가 지도층의 무기에 대한 전략적 사고가 있어야 하고, 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과학기술, 그리고 무기 제조에 드는 비용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려는 최무선(崔茂宣)의 노력으로 화약 제조기술을 획득하였고, 이를 토대로 화약·화약 병기를 생산하여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1377년(고려 우왕 3)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과 화기 제조를 담당할 전문기구인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되었다. 화통도감에서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 18종의 각종 화기와 발사물이 제작되었다. 이때부터 고려의 화약 및 화기 제작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화통도감의 구성이나 규모, 화약 병기의 위력 등에 대해서는 문헌자료가 적어 자세히 알 수 없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화기의 발전 추세는 주춤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해 불안정한 상황에서 화기가 반대 세력의 군사적 저항에 악용될 것을 우려하여 현상 유지에만 치중하고 새로운 개발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화기는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태종 때부터 다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최무선의 화약과 화기 제조술이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에게 전승되었고, 이후 화약 병기는 국가 차원에서 관리, 개발되었다.

특히 세종은 북방의 4군 6진 등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화약과 화기 개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이를 추진하였다. 세종은 재임 기간에 화기 개량을 대대적으로 단행하였는데, 주요 목적은 화약을 적게 쓰고,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기술, 즉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화기 사격법의 개혁도 이루어져 사격을 하는 사수와 장전을 해주는 보조로 나눔으로써 사수는 좀 더 전문적인 기술로 화기의 전술적 운용이 가능해졌다. 나아가 세종은 이들 화포를 개량하고 표준화, 규격화하는 일을 시작하였고, 1448년(세종 30) 9월에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함으로써 이를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화약과 화기 제작 기술은 국제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화기 제작 기술에 대한 지나친 통제와 장기간의 평화로 국정이 무사안일하게 운영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화약과 화기 제작 기술에 관한 한 선진국이었던 조선은 점차 후진국으로 전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은 그때까지만 해도 무기의 선진국이라 자처했던 조선의 실정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전쟁 초기에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鳥銃) 전술에 맥없이 무너져 육상 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소지한 조총의 성능이 월등하기도 했지만,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한 조선군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연전연승하였는데, 이는 조선 수군이 천·지·현·황자총통 등 우수한 대형 화포를 거북선과 판옥선에 장착하고 싸움에 임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형 화포는 대형 화살[箭]과 수많은 탄환을 발사하여 먼 거리에서도 적선을 너끈히 격파하는 우수한 성능을 지녔던 것이다.

이후 조선은 초기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피아간의 화기 성능상의 우열과 전술상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난을 타개하기 위한 길은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 화기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조총(鳥銃)을 비롯하여 호준포(虎蹲砲), 불랑기(佛狼機), 삼안총(三眼銃), 백자총통(百字銃筒) 등을 개발하였다.

형태 및 용도

고려시대에 제작된 화통은 유통식(有筒式) 구조로서 총신 부위인 부리부[嘴部], 화약이 들어가는 약통부(藥筒部)와 손잡이 형태의 자루를 끼우는 병부(柄部) 등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15세기를 전후로 격목(激木)이 사용되면서 부리부·격목부·약통부·병부로 구성되는 조선만의 독자적인 구조로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는 이전의 화기 제작이 중국의 화기를 모방하는 수준이었으나 조선 세종대 이후 제조기술이 발전하여 독자적인 현태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화기 구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위인 격목부는 약통 속에 넣은 화약이 폭발할 때 폭발가스의 유출을 방지하여 폭발력을 더 키움으로써, 총통이나 포의 성능을 좋게 하기 위해 약통의 앞부분에 끼우는 나무인 격목을 장착하는 부분이다.

이 격목부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시기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었는데, 크게 무격목형(無激木形), 격목형(激木形), 토격형(土隔形)으로 구분된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해당하는 14~15세기 초에는 중국의 화기를 모방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격목이 사용되지 않는 구조 즉 무격목형이었다. 이후 세종 말기인 15세기 중반에 대대적으로 화기를 개량하여 화기의 사거리를 높이기 위해 격목을 사용하는 구조인 격목형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16세기에 이르러 발사물이 화살[箭]에서 탄환으로 바뀌어 토격형의 총통이 등장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사편찬위원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두산동아, 2007.
  • 김기웅 외, 『한국무기발달사』, 국방군사연구소, 1995.
  • 박재광, 『화염 조선-전통 비밀 무기의 과학적 재발견』, 글항아리, 2009.
  • 채연석, 『한국초기화기연구』, 일지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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