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흠(睦叙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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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1년(선조4)~1652(효종3) = 82세]. 조선 중기 선조~효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목첨(睦詹)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참판정건(鄭謇)의 딸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현헌(玄軒) 목세칭(睦世秤)의 손자이고, 좌의정목내선(睦來善)의 아버지다. 태어난 해가 그의 비명에는 1571년으로,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1572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동생 목장흠(睦長欽)이 1572년에 출생했기 때문에 방목의 기록이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아버지 목첨(睦詹)과 형 목수흠(睦守欽)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상례를 마친 다음에 1597년(선조30) 음보로 제용감(濟用監)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가 내시(內侍) 교관(敎官)을 거쳐 호조 낭관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39) 형조 낭관을 거쳐 양주현감(楊州縣監)으로 나갔으나, 문묘낙서(文廟落書) 사건이 일어나서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2)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0세였다. 1612년(광해군4) 병조 정랑에 임명되어,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621년(광해군13)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 · 수찬(修撰) ·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고,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그때 양곡을 운반하는 독운관(督運官)으로 차출되었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3년(인조원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함경도 선유어사(宣諭御史)로 임명되어 함경도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였다.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고,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가,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군자감(軍資監)정(正)으로 옮겼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공주(公山)까지 인조를 호종하였는데, 행재소(行在所)에서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625년(인조3)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태안군수(泰安郡守)에 임명되었다. 1628(인조6) 유학(幼學)임지후(任之後)가 <인성군(仁城君)이공(李珙)의 역모>를 고변하였는데, 이 사건과 관련되어 목서흠은 동생 목장흠과 아들 목기선(睦嗜善) 등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대질 심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나갔다가, 1630년(인조8) 부사직(副司直)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1635년(인조13)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병조 참지로 옮겼다가 곧바로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인조를 모시고 청나라 군사와 싸웠다. 1637년(인조15) 인조를 호종한 공로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 1638년(인조16) 개성유수(松都留守)에 임명되었는데, 선정을 베풀고 선죽교(善竹橋)를 복구하였으며 화담서원(花潭書院)을 수리하였다. 1642년(인조20) 개성유수로 있으면서 붕당의 해로움을 상소하여 인조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1643년(인조21) 한성부 우윤(右尹) · 좌윤(左尹)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官)에 임명되어, 의금부(義禁府)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1646년(인조24)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

1650년(효종원년) 효종이 즉위하고 그를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하자 그는 늙고 병이 들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효종은 노인이라고 우대하여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중추부 지사로 임명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80세였다. 1652년(효종3) 3월 24일 서울 청파리(靑坡里: 청파동) 아버지 옛집에서 죽었는데, 향년이 82세였다.

성품과 일화

목서흠은 그 용모는 침착하였고 겉으로는 유순하며 속으로는 방정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라 성실하였으므로,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한다.

택당(澤堂)이식(李植)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목서흠을 “내가 국사[國乘]를 살펴보니, 목서흠은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한 점의 흠도 없고, 붓 끝에 시비(是非)도 또한 그에게 미치지 않으니, 참으로 한 세대의 완전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요하지 않은 한직에 내버려두는 것은 애석하다고 할 만하다.” 라고 평가하고, 그를 대사간의 후보자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낙점(落點)은 받지 못하였다.

휴옹(休翁)정홍익(鄭弘翼)은 목서흠과 막역(莫逆)한 친구로 지내면서 그를 사악한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정홍익이 세상을 떠나면서 과부가 되는 아내와 어린 딸을 목서흠에게 부탁하였는데, 목서흠은 자기 넷째 아들 목지선(睦志善)을 그의 딸에게 장가보내어 그 집안일을 경영하게 하여 후사가 없는 친구가 귀신이 되어서 제사를 흠향하고 굶주리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해사촌(海寺村) 도봉산(道峰山) 기슭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이 왼쪽에 묻혔다. 그의 동료 용주(龍洲)조경(趙絅)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권탁(權晫)의 딸인데,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3남 목겸선(睦兼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고, 5남 목내선(睦來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을 지냈다. 3남 목겸선이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참여하여 아버지도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용주유고(龍洲遺稿)』
  • 『백헌집(白軒集)』
  • 『백곡집(柏谷集)』
  • 『석담집(石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