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靴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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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防寒)·방습(防濕) 목적의 신목이 높은 장화 형태의 덧신.

내용

화(靴)는 신목이 높은 신으로 삼국시대부터 자피화(紫皮靴)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는 흑피화(黑皮靴)·목화(木靴)·수화자(水靴子)·백피화(白皮靴) 등 다양한 명칭이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 공복(公服)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화를 신었고, 상복(常服)에는 당상관(堂上官)만이 협금화(挾金靴)를 신었으며 향리(鄕吏)는 공복에도 흑피혜(黑皮鞋)를 신었다. 그러나 천인(賤人)들에게는 허락지 않았던 신이다. 투(套)는 덮개의 뜻을 갖고 있다. 화투(靴套)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특히 세종대에 사신에게 하사한 물품 중에 화투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그 예로 1423년(세종 5) 4월에 사신 유경(劉敬)과 양선(楊善) 등이 유지우삼(油紙雨衫)과 화투를 요구하였고(『세종실록』 5년 4월 16일), 같은 해 9월에는 사신에게 하사한 물품 중 겨울 옷 1벌과 초구(貂裘)·초관(貂冠)·이엄(耳掩)·호슬(護膝)과 함께 화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화투는 분투혜(分套鞋)와 마찬가지로 방한, 방습의 목적으로 화 위에 신은 덧신임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5년 9월 3일).

한편 1426년(세종 8) 1월에는 참외(參外)와 직업이 없는 사람까지도 모두 투(套)를 신어, 이것은 상하 계급의 구별이 없게 될 뿐 아니라, 가죽 값이 뛰어올라서 소를 잡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으므로 이를 금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투의 재료로 쇠가죽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8년 1월 26일). 또한 1483년(성종 14) 8월의 기록에는 상사(上使)의 사은물(謝恩物) 중에 마피화투혜구(馬皮靴套鞋具)가 포함되어 있어 주로 쇠가죽과 말가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14년 8월 11일).

용례

劉景請小刀九油紙雨衫 楊善請靴套油紙雨衫 命與之(『세종실록』 5년 4월 1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조선상식(朝鮮常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