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임(鄕任)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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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향임 |
한글표제 | 향임 |
한자표제 | 鄕任 |
상위어 | 유향소(留鄕所), 향청(鄕廳) |
하위어 | 고감(庫監), 별감(別監), 좌수(座首), 창감(倉監), 향장(鄕長), 향정(鄕正) |
동의어 | 감관(監官), 향원(鄕員) |
관련어 | 향족(鄕族), 유향품관(留鄕品官), 향안(鄕案), 유향분기(留鄕分岐) |
분야 | 사회/향촌/지방자치 |
유형 | 직역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김현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향임(鄕任)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4년 5월 6일, 『현종실록』 9년 7월 21일, 『정조실록』 15년 10월 14일, 『정조실록』 1년 3월 21일, 『순조실록』 23년 11월 12일 |
조선시대 지방 수령의 자문이나 보좌를 위하여 향족들이 조직한 향청의 직임.
개설
향청(鄕廳)은 조선시대 지방의 수령을 자문·보좌하던 자치 기구로서, 조선전기에는 유향소(留鄕所)라 불렸으나 임진왜란 이후 대개 향청이라 불렀다. 유향소는 향촌에 거주하는 품관(品官), 곧 유향품관(留鄕品官)들이 조선 건국 초기 고려시대의 사심관제(事審官制)를 본떠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鄕風)을 바로잡기 위해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들 유향품관, 즉 향임(鄕任)들이 수령권을 능멸하는 등 중앙집권화에 저해되는 사례가 빈발하였다. 이에 태종대 이후 치폐(置廢)를 거듭하다 1488년(성종 19) 다시 설립되었고, 이듬해 유향품관 가운데에서 좌수(座首) 1명과 이를 보좌하는 별감(別監) 3~5명을 두어 유향소를 운영하게 하였다. 그 뒤 점차 각 지방마다 지역 사회의 지도층인 사족(士族)으로 구성되는 계(契)가 조직되고 그 명부를 향안(鄕案)이라 하였으며, 향안에 등록된 구성원을 향원(鄕員)이라 하였다.
향족(鄕族)은 원래 사족으로서 법제적으로도 사족의 부류에 포함되었으나, 유향소가 이름도 향청으로 불리고 수령의 하수 기구화함에 따라 사족들이 맡기를 꺼려하면서 좌수나 별감 등을 맡거나 그와 관련이 있는 족속을 말한다.
담당 직무
유향소의 향임은 계의 집행 기구로서 향원 중에서 선출하였다. 향원 전원이 참석한 향회(鄕會)에서 향규(鄕規)에 따라 50세 이상의 향원 중에서 좌수를, 30세 이상의 향원 중에서 별감을 각각 선출한 뒤 중앙의 경재소(京在所) 추천으로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 36) 경재소가 혁파된 뒤에는 향회에서 추천은 하였지만 실제 수령이 임명권자가 되면서 기능도 크게 변화하였다.
그 밖에 창감·감관이나 면의 풍헌(風憲)이나 이(里)의 약정(約正) 등도 넓은 의미의 향임에 포함될 수 있다. 이들은 좌수의 추천으로 수령이 임명하였는데, 창감과 감관은 전정(田政)·환정(還政)·진정(賑政) 등의 실무나 사소한 송사의 집행자였기 때문에 향권이 이들 향임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풍헌은 각 면내의 수세(收稅)·차역(差役)·금령(禁令)·권농(勸農)·교화 등 모든 일선 행정 실무를 주관함으로써 민정을 장악했다.
향임층은 향청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향청의 구성 및 임무는 지방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좌수 1인과 별감 2인이 우두머리가 되어 수령을 보좌하는 직임을 맡았는데, 이들을 삼향소(三鄕所)라고 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이전용인조(吏典用人條)에 따르면, 좌수는 이방(吏房)과 병방(兵房)의 업무를 관장하고, 도별감(首別監) 또는 일별감(一別監)으로 불렸던 좌별감(左別監)은 호방과 예방의 업무를 관장하고, 말별감(末別監) 또는 이별감(二別監)으로 불렸던 우별감(右別監)은 형방과 공방의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 각도의 통례였다.
이들은 군역에 관한 소송과 부세에 대한 소송 등의 조사 및 조정을 담당함으로써 수탈 구조 내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각 면에는 풍헌(風憲)과 부헌(副憲)이 있었는데, 이들은 좌수가 추천하였다. 부헌은 달리 약정(約正)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목민대방(牧民大方)』에 의하면 풍헌은 권농감관(勸農監官)을 겸하였으며, 면의 문보(文報)·풍화(風化)·금령(禁令)·권농 등의 대민 행정 실무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부헌은 면의 권농·차역·금령 등의 일을 관장하며, 풍헌의 유고시에는 문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향임직은 별감·도감 등 감독의 직임을 담당함으로써 감독 기능을 통하여 부세제도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향청이 수령의 보좌 및 집행 기구로 변질됨에 따 향청의 임원도 점차 수령의 하수인화되어 이서(吏胥) 집단이 하던 행정 실무도 함께 하기는 하였지만, 행정 실무의 주기능은 어디까지나 이서층이 맡았다.
원래 향임층과 이서층은 서로 구별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19세기의 기록에서는 흔히 ‘이향(吏鄕)’으로 병칭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지방 지배 체제에서 두 계층의 역할과 기능이 근접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행정 실무와 관련한 기능의 경우 이서층이 도맡아 했기 때문에 수령-이향 지배 체제 하에서의 부세제도 운영에서 점하는 비중은 이서층이 향임층보다 컸다.
변천
조선전기에는 좌수를 유향품관 중에서 천거하여 경재소에서 임명하고 별감은 좌수가 추천하여 경재소에서 임명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향안 입록자, 즉 향원들의 모임인 향회의 추천으로 수령이 좌수를 임명하고, 좌수가 별감 등을 추천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이들 향임들은 호적·군적 등 여러 읍무(邑務)를 도맡아서 향권을 장악하였으나, 조선중기 이후 군사 훈련이나 조운선 동승 등 좌수의 임무가 고역이 되자 사족의 체통을 유지하려는 부류들이 향임직을 회피하여 유향분기(留鄕分岐)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향분기와 더불어 1654년(효종 5) 「영장사목(營將事目)」이 반포된 이후로 군역차정(軍役差定)에 관한 책임까지 향청이 떠맡게 되면서 향임은 천예(賤隷)와 같이 취급되었다. 이에 따라 사족들의 향임 기피 현상이 심화됨으로써 새로운 세력, 즉 사족이 아닌 향족(鄕族)들이 향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향임은 수령의 하수(下手) 기구로서 향리들과 비슷한 지위로 전락하였으며, 좌수·별감 등 향임직을 일정한 가계가 독점, 세습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향족 계층이 형성되었다.
17세기 이후 유향분기에 의하여 향촌 사회에서 하나의 계층을 이룬 이러한 향족을 향품(鄕品) 또는 품관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좌수나 별감, 감관 등 각종 향임직을 독점, 세습하여 향권을 장악하였다. 광해군대에 과거 시험장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에, 당사자인 조광벽이 "문(文)도 아니고 무(武)도 아니며 다만 향임으로 일을 삼았다."(『광해군일기』 4년 5월 6일)는 구절에서 보듯이, 향임은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직에 진출하려는 의지가 없는 계층, 즉 향족을 말한다고 하겠다.
1603년 경재소의 혁파는 경재소-유향소 체제로 지방을 지배했던 조선시대의 지방 지배 체제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재경 관인은 자신의 출신 지역이라 하더라도 그 지역의 수령이나 통치에 대하여 어떠한 개입도 하면 안 되었다. 대구 출신 예조 정랑도신여(都愼與)의 유배 사건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도신여는 당시 신임 대구부사인 최응천(崔應天)에게 부탁하여 전임 부사의 비리를 비판하고, 자기와 관련이 있는 사람을 향임에 차임해야 한다고 수령을 지휘한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현종실록』 9년 7월 21일). 조선전기 경재소-유향소 체제 아래였다면 도신여의 행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경재소가 혁파된 조선후기 이후에는 관인의 그러한 간섭이 탄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8세기 말 이후로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관서 지역과 관북 지역에서는 향안 입록이나 향임 직첩을 파는 이른바 매향(賣鄕) 풍조가 나타나면서 향임의 질이 크게 저하되었다. 이러한 매향의 사례를 평양서윤조진명 사건에서 볼 수 있다(『정조실록』 15년 10월 14일).
조진명은 평양서윤으로 3년 동안 재임하면서 660여 명의 좌수·별감·도감·집헌(執憲)·약정(約正)을 차출하였는데, 그 중 170여 명은 향천(鄕薦)으로 차출한 것도 있고 면보(面報)로 차출한 것도 있고 백성의 구제를 도운 공로로 차출한 것으로, 이들에게서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490여 명은 사적인 안면으로 남의 청탁을 받고 차출한 것도 있고, 혹은 아전이나 향임에게 속아서 차출한 것도 있고, 또 간혹 아객(衙客)들이 중간에서 차출 받으려 한 것으로, 이들에게서 받은 돈이 3만 4,600여 냥이나 되었다. 이처럼 불법적인 것이긴 하지만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관서 지역과 관북 지역에서는 매향이 일상화되었고, 향임첩을 받은 자들은 역을 면하게 되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양역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이후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서얼 통청운동이 일어났다. 서얼들이 중앙 관직뿐만 아니라 지방 향안에의 입록, 향임에의 임명 등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1777년(정조 1) 정조는 이조와 병조에 명하여 서얼들을 소통시킬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여 절목을 마련하였는데, 그 절목 중에도 "외방의 향임은 수임(首任), 즉 좌수 이외의 여러 직임은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참용(參用)시킬 것"을 규정하였다(『정조실록』 1년 3월 21일). 이러한 중앙의 지시는 실제로 지방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았다.
이에 순조대에 다시 서얼들에게 벼슬길을 열어 줄 것을 논하면서 아울러 외방 고을의 향교나 서원의 유향 및 향임은 감사나 수령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억울함을 풀어 주도록 지시하고, 나아가 수임을 임명하는 고을에서도 한계가 있으니 더욱 소통할 것을 지시하였다(『순조실록』 23년 11월 12일). 이에 각 지역에서 서얼이 향임을 하는 것은 일단 법적으로는 제한이 없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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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덕, 『향청연구』, 한국연구원, 1978.
- 김인걸, 「조선 후기 향안의 성격 변화와 재지사족」,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3.
- 김인걸, 「조선 후기 향권의 추이와 지배층 동향 -충청도 목천현 사례-」, 『한국문화』2, 1981.
- 김현영, 「17세기 연기 지방의 향규와 향촌사회구조」, 『한국학보』61, 1990.
- 오인택, 「19세기 말엽 경상도 지역의 향촌사회 지배조직과 수령권 -오횡묵의 총쇄록을 중심으로-」, 『지역과역사』2, 1996.
- 이상찬, 「1894~1895년 지방제도 개혁의 방향 -향회의 법제화 시도를 중심으로-」『진단학보』 67,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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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菅野修一, 「李朝後期の鄕所いつい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18, 1981.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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