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군관(舟師軍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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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영과 병선에서 활동하면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전투에 종사하였던 군관.

개설

조선시대 진영(鎭營)과 병선(兵船) 등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다양한 군사적 업무를 수행하던 장교급의 무관을 말한다. 이들은 장수의 지휘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군사적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군졸들을 지휘했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의 선군(船軍)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선에 탑승해서 적선을 방어하고, 해변 지역에 대한 외적이나 해적의 침입을 경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운(漕運)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고, 어물과 소금을 채취해 상납해야만 했다. 아울러 둔전(屯田) 경작과 축성(築城) 등 각종 잡역에도 동원되는 경우가 많아 조선시대에 매우 힘든 역(役)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선군의 역을 피하려는 자들이 많아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규와 각종 지원책들이 많이 시행되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수군 피역 현상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군관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선군 등을 지휘·통제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책임과 부담이 따랐다. 또한 조선중기 이후에 선군들이 역을 회피하는 현상이 심각해지자 국가에서는 그들의 인원을 파악해 지휘 책임이 있는 장수와 군관을 처벌하는 법규를 제정하기도 했다. 수군의 역이 과중해질수록 군관의 부담 역시 커졌다.

조선의 병선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이 함께 탑승했다. 전투력을 가진 수군은 병선에서 보통 포수(砲手)·화포장(火砲匠)·사부의 보직을 담당했다. 비전투 선원으로 대표되는 수군은 바로 격군(格軍)이었다. 이들은 병선의 노역이나 기타 잡역 등을 담당했다. 대개의 경우 전투요원이었던 사부나 포수들보다는 격군의 수가 더 많았던 것으로 설명된다. 조선후기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판옥선(板屋船)의 정원은 총원 164~194명이었다. 이 중 노 젓는 일을 담당하는 노군(櫓軍)이 100~120명, 포수·화포장·사부 등 전투원이 52~62명, 타공(舵工) 및 기타 인력이 10명이었다.

조선 수군의 병선은 초기에는 모두 맹선(猛船)과 같은 단층의 평선(平船)이었다. 평선의 구조상 활을 쏘아야 하는 사부(射夫) 같은 전투원과 노군이 한곳에 모여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군은 겁을 먹어 자기 힘을 다하지 못하고, 사부들은 장소가 비좁아 전투능력을 다 발휘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조선은 결국 판옥선(板屋船)이라는 획기적인 병선을 개발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판옥선은 갑판을 2층으로 설계해서 전투원과 격군의 활동 공간을 구분해놓았다.

이와 같은 조선 수군의 전투 방식을 실전에서 지휘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중요한 무관이 바로 주사군관이었다. 특히 판옥선과 같은 형태의 병선이 개발되기 전에는 사부들과 격군이 함께 활동해야 했기 때문에 주사군관들의 지휘 능력이 보다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왜구 문제 등으로 인해 해안 방어의 중요성과 전선의 순찰 활동을 강화했기 때문에 주사군관들의 역할이 항상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건국 후 수군 체제의 정비를 통해 전선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주사군관의 수도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차문섭, 『朝鮮時代 軍制硏究』,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한국군사연구실,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육군본부, 1968.
  • 오종록, 「朝鮮初期 兵馬節度使制의 成立과 運用 上」, 『진단학보』59, 진단학회, 1985.
  • 오종록, 「朝鮮初期 兵馬節度使制의 成立과 運用 下」, 『진단학보』60, 진단학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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