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船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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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시대에 각 포와 진에 배치되어 해안을 방어하거나 병선을 타고 임무를 수행하던 군인 또는 수군.

개설

전선을 타고 싸우는 군병이라 하여 ‘선군’으로 불렸으며, ‘기선군(騎船軍)’이라고도 하였다. 주로 해안 방어와 해상 전투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육군의 정병(正兵)과 더불어 양인의 의무 병역이었다.

고려의 선군은 양계(兩界)와 동남해(東南海)의 도부서(都府署)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려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편제가 사실상 붕괴되어 있었다. 고려말이 되어 왜구 문제가 극심해지자 재건하여 해변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선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선에 탑승해서 적선을 방어하고, 해변 지역에 대한 외적이나 해적의 침입을 경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성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漕運)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고, 어물과 소금을 채취해 상납해야만 했다. 아울러 둔전(屯田) 경작과 축성(築城) 등 각종 잡역에도 동원되는 경우가 많아 조선시대에 매우 힘든 역(役)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선군의 역을 피하려는 자들이 많아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규와 각종 지원책이 많이 시행되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수군 피역 현상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의 선군 편제는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선군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군정(軍丁) 총계 96,259인 중 선군이 49,337인으로 반수를 초과하고 있다. 조선시대 양인의 의무 병종으로서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전기에 수군의 중요성과 해당 역을 수행하기 어려웠던 점을 의식했던 조치로 보인다.

초기의 선군에는 진무(鎭撫)·영선(領船)·두목(頭目)·지인(知印)·영사(令史)·사관(射官)·격군(格軍) 등의 여러 가지 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수군으로 정리되면서 편제가 만호(萬戶)·천호(千戶)·영선 등으로 정리되었다.

선군은 분령체제(分領體制)에 의해 좌·우영으로 나뉘어 6개월마다 교대 근무했다. 따라서 입역자들은 2번으로 나누어 1개월씩 교대해가며 1년 동안 모두 6개월을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근무 중 역을 지고 있는 자들의 경제적 지원을 위해 그들의 집안일을 보조하는 봉족(奉足)이 배속되었다. 연해 지역의 백성만이 아니라 내륙 지역의 백성들도 선군에 입역(入役)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호수(戶首)와 봉족(奉足)이 교대해가며 차례대로 입역할 수 있었지만 후대에는 호수만 입역하도록 제반 규정이 강화되었다.

선군은 근무지가 다양했지만 주로 연해의 방어 거점을 중심으로 설치된 포(浦)와 진(鎭)에서 근무했다. 이들은 모두 만호의 지휘를 받았다. 선군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인원들은 자신의 군량을 스스로 준비해서 근무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선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해변 방어에 관련된 제반 업무와 군선에 탑승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선군들은 배치된 군선 등에서 포수(砲手)·화포장(火砲匠)·사부(射夫)·격군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군사 활동 외에도 둔전의 경작과 염전(鹽田) 작업, 소금 굽는 일, 해산물의 채취, 병선 수리, 조운선의 호송 및 경호, 세곡 운반, 목장, 축성, 기타 잡역 등의 일을 모두 해야만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선군의 역은 점차 무거워졌고 이를 피하려는 사람이 많아져 충분한 인원의 선군을 확보하지 못해 사회문제가 되었다.

선군이 승선하는 병선에는 대맹선(大猛船)·중맹선(中猛船)·소맹선(小孟船)·쾌선(快船)·귀선(龜船)·별선(別船)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각 병선마다 승선 인원이 규정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맹선 80인, 중맹선 60인, 소맹선 30인 승선이 규정이었다.

변천

선군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 크게 정비되고 많은 임무를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선군에게 부여되는 임무가 많아지면서 백성들에게 힘든 역으로 인식되었고 역을 피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이 등장해 국정 운영에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미 15세기부터 자신의 부역 기간 동안 대가를 지불하고 남에게 대신 역을 치르게 하던 대립(代立)이 성행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방지하고자 성명·나이·용모·키·거주지·소속 포구를 기록한 목패(木牌)를 차도록 했지만 실효성에 한계가 있었다. 아울러 포(布)나 곡식 등을 받고 역을 면제해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의 폐해가 나타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선군을 확보하기 위해 관직을 내리거나 해당 역을 수행하는 자에게 다른 역을 면제해주는 등의 혜택을 제공하기도 했다. 아울러 역을 피해 도망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선군의 결원이 5인 이상인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특히 성종대에는 선군의 역을 세습시키며 다른 잡역에 동원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선군의 역은 가벼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후기에는 가장 천대받던 일곱 가지 신분인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로 규정되기까지 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선군 역에 대한 대립과 도망은 지속되었다. 심지어는 대립이 심해지면서 만호가 혼자서 포를 지키는 상황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윤훈표, 『여말선초 군제개혁연구』, 혜안, 2000.
  • 민현구, 「근세조선전기 군사제도의 성립」, 『한국군제사 -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이재룡, 「조선전기의 수군 -군역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5, 한국사연구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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