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射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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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병선(兵船)에서 활과 화살을 사용해 적을 공격하던 임무를 부여받았던 수군 병사.

개설

조선의 병선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이 함께 탑승했다. 전투력을 가진 수군은 병선에서 보통 포수(砲手)·화포장(火砲匠)·사부의 보직을 담당했다. 비전투 선원으로 대표되는 수군은 바로 격군(格軍)이었다. 이들은 병선의 노역이나 기타 잡역 등을 담당했다. 대개의 경우 전투요원이었던 사부나 포수들보다는 격군의 수가 더 많았던 것으로 설명된다. 조선후기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판옥선(板屋船)의 정원은 총원 164~194명이었다. 이중 노 젓는 일을 담당한 노군(櫓軍)이 100~120명, 실질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포수·화포장·사부 등 전투원이 52~62명, 타공(舵工) 및 기타 인력이 10명이었다.

옛날부터 한국 수군의 방어체제는 거의 대부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다. 왜인들은 검술에 매우 능했다. 고려 말과 조선초기의 왜구들도 검 한 자루만으로 무장을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육상전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수군 전법조차도 적선에 올라가서 백병전을 벌여 병선을 점령하는 방식이 많았다. 왜인들의 해전 전술은 검술을 바탕으로 하는 접전(boarding tactics)이었다. 이에 대하여 고려와 조선의 수군 전술은 적선과 일정한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활로 적을 사살하거나 불화살을 쏘아 배를 태워버리는 공격 방식을 사용했다. 따라서 사부의 역할은 수군과 병선의 공격 전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수군의 병선은 초기에는 모두 맹선(猛船)과 같은 단층의 평선(平船)이었다. 평선의 구조상 사부 같은 전투원과 노군이 한곳에 모여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군은 겁을 먹어 자기 힘을 다하지 못하고, 사부들은 장소가 비좁아 전투능력을 다 발휘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결국 판옥선이라는 획기적인 병선을 개발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판옥선은 갑판을 2층으로 설계해서 전투원과 격군의 활동 공간을 구분해 놓았다.

이를 통해 병선의 전투원들이 높은 위치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적이 접근하여 배에 함부로 올라오기 어렵게 되었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 전술의 큰 발전을 가져온 병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판옥선의 구조는 사부와 포수의 역할을 더욱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 수군의 전투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특히 판옥선은 사부의 활 쏘는 위치와 함포의 사격 위치가 높아서 포격전에 매우 유리했다. 당시의 화포는 사정거리가 수백 보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격 위치가 높을수록 사정거리와 명중률이 향상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상장갑판 위에 화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높은 위치에서 접근해 오는 적선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었다.

아울러 판옥선은 조선 병선의 기동성도 높였다. 판옥선의 선체가 종래의 배에 비하여 크고 또한 노역을 하는 장소도 넓었기 때문에 노군의 수를 쉽게 증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 한 자루에 5명의 노군이 붙어서 노를 저었는데 판옥선의 구조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판옥선의 기동성은 주변국의 병선에 비해 우월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金在瑾, 『朝鮮王朝軍船硏究』, 일조각, 1977.
  • 한국군사연구실,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육군본부, 1968.
  • 金在瑾, 「조선업」, 『한국사』24, 국사편찬위원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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