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진법(浙江陣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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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왜구의 단병전술(短兵戰術)에 대응하기 위하여 개발한 것으로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있는 병법.

개설

절강진법은 척법(戚法)이라고도 한다. 16세기 왜구는 주로 해안선을 따라 습지가 많은 중국의 절강 지방 등을 노략하였다. 이를 소탕하는 데에는 종래 북방 유목민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편제된 군제(軍制)와 무기 및 전술이 적합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에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북병(北兵)과 남부 해안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倭寇)에 대비하기 위한 남병(南兵)이 있었는데, 당시 절강현을 지키던 척계광이 근접전에 역점을 두고 개발한 것이다. 이 병법을 절강 지방에서 나왔다고 하여 절강병법(浙江兵法)이라고도 한다.

왜구의 기습적인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부대의 운용과 접근전에 적합한 전술을 고안했는데, 소대가 모두 방패를 착용하도록 편성하였으며, 기병을 쓰지 않는 한편 낭선(狼筅)을 개발하였고, 조총에 대비하여 탄환을 막을 수 있는 솜옷을 개발, 조총과 전통적인 화기를 소지하면서 왜의 새로운 전술에 대응하였다. 이 병법은 임진왜란 때 원병(援兵)으로 온 남병에 의하여 선을 보였으며, 그 우수성이 십분 인정됨에 따라 조선의 전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남병의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도움을 받아 그 습득에 노력하였으며, 조선후기의 병법은 이 척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절강진법은 명확한 지휘편제와 연대책임을 강조하는 속오법(束伍法)을 채택하고, 조총(鳥銃)·등패(藤牌)·낭선(狼筅)·장창(長槍)·권법(拳法) 등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절강진법은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기효신서』는 종래의 병서가 원리 원칙 문제를 취급한 데 비하여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즉 분수(分數), 조련(操練), 진법(陣法), 병기(兵器) 등 군대의 편제·훈련 문제를 실전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취급하고 있다. 『기효신서』는 모두 18권인데, 그 내용은 속오(束伍), 조령(操令), 진명(陣名), 유병(諭兵), 법금(法禁), 비교(比較), 행영(行營), 조련(操練), 출정(出征), 장병(長兵), 패선(牌筅), 단병(短兵), 사법(射法), 권경(拳經), 제기(諸器), 정기(旌旗), 수초(守哨), 수병(水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효신서』는 전란 중이던 1593년 1월 초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이끈 군대가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이 전법으로 일본을 대파하면서 알려졌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먼 곳에서 화공(火攻)으로 일본군의 기선을 제압한 후 다양한 단병기를 든 병사가 돌진해 적을 공격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이 전법은 조선인 눈에 매우 인상적으로 보였고, 또 명군이 사용한 불랑기(佛狼機)나 호준포(虎蹲砲), 단병기인 장창(長槍)·낭선·당파(鏜鈀) 등은 당시 조선에서는 매우 생소한 무기였다.

이후 조선은 자체적으로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를 양성하는 한편 명나라 군사 중에서 무예에 숙달한 자를 조선에 머물도록 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기효신서』의 속오법과 삼수기법(三手技法)에 따라 중앙군으로는 훈련도감, 지방군으로는 속오군(束伍軍)이 설립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설립된 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금위영(禁衛營) 등 중앙 군영들도 이에 따라 편제되었다. 조선전기의 졸(卒)-오(伍)-대(隊)-여(旅)-통(統)-부(部)-위(衛)로 이어지는 부대편제는 폐지되고 대-기(旗)-초(哨)-사(司)-영(營)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부대편제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병법이 한국의 지형과 실정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변용 활용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조총을 중시하면서 군대편제를 더욱 세분화·다양화하였다.

또한 병법에 있어서도 전기의 것을 계승하면서 군대편제의 변동에 따라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연병실기』의 연구에 주의를 돌렸다. 조선후기의 병서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병학지남(兵學指南)』이다. 이 책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요령 있게 참고하여 조선 실정과 조건에 적합하도록 간추려 만든 것으로 병학 학습의 교본(敎本)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병학지남』은 절강병법을 기초로 하여 조선군이 활용한 병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병학지남』의 발간 시기는 정조 이전이다. 이 같은 사실은 정조 초기에 편집한『병학통(兵學通)』이 『병학지남』에 의거한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1787(정조 11)에 간행된 『병학지남』에 수록된 이유경(李儒敬)의 범례(凡例)에서 훈국구본(訓局舊本)이 이미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또 『병학지남』이 훈국본 외에 남한본(南漢本), 해서본(海西本)이 있고 언해(諺解)까지 1부 있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후 정조가 장신(將臣)들에게 명령하여 종래의 『병학지남』의 결함을 시정하고 이에 첨삭하여 1787년 겨울에 발간한 것이 정미신간(丁未新刊) 장영장판본(壯營藏板本)이다. 지방 병영에서는 원본 이외에 이 책도 발간하였다.

변천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조·명·일 삼국 가운데 무기체계의 발달에 있어서는 명나라에 버금가는 상황이라고 자처해 오던 조선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비로소 무기 후진국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 연속적으로 패함으로써 여실히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조선 수군의 연승과 의병들의 활약, 명군의 지원 등을 바탕으로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초기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화기와 전술을 도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다양한 무기와 전술이 도입, 운용되었다.

1593년(선조 26) 2월, 선조는 중앙과 지방의 군사들에게 조총을 학습하도록 하여, 조총사격술을 과거 시험과목에 넣었고, 조총 3발을 사격하여 1발 이상 명중시킨 자를 선발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군기시로 하여금 서울에 와 있는 명나라의 참장낙상지(駱尙志)의 진지에 약간 명의 포수를 보내어 포술을 익히게 하였고, 다음 달에는 행재소의 무신 및 금군과 화포장에게 명군의 각종 화포를 비롯한 창·검·낭선·방패 등을 익히도록 하는 등 포수의 양성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포수를 양성하여 자체 조총부대를 창설하려는 준비 작업이었다.

그 후 8월 19일에는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장정을 선발하고, 여러 가지 무예를 가르칠 것을 비변사에 지시하였으며 훈련도감의 「훈련사목(訓練事目)」을 반포하는 등 훈련도감의 창설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같은 해 10월, 선조가 의주에서 귀경한 후부터 더욱 활발해져 같은 해 11월에는 중국의 대왜방비책(對倭防備策)의 교범이 되었던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내용에 따라 도감의 편제를 정비하여 훈련도감에 좌·우영을 두었고, 훈련지사이일(李鎰)과 조경(趙儆)으로 하여금 이를 분담하여 포수를 훈련케 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부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594년(선조 27) 2월 훈련도감은 임시기구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어엿한 군영으로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훈련도감의 창설로 조선군의 전술은 종래의 궁시 위주에서 포와 살, 즉 조총과 창검 위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조총을 포함한 각종 화기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포수를 양성하고 속오군(束伍軍)을 편성하기 위해 화기를 자체 생산하여 조달할 수 있도록 기존의 「훈련사목」에 그 내용을 추가하여 각 도의 감·병·수영 및 각 읍에 반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같은 해 7월 3일에는 훈련도감이 서울에서 포수 600명을 양성하여 지방에 일부를 내려보내고 330명만이 남아 있다고 보고하는 등 포수의 양성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포수의 양성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포수의 양성을 더디게 했던 요인으로는 군량과 조총의 부족, 일부 위정자들의 훈련도감군의 전술적 효과에 대한 회의적 반응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총을 포함한 화기 개발과 그 전술적 운용의 효과를 정확히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선조의 지지를 받아 계속적으로 조총을 제작하고 포수의 양성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포수의 양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1593년(선조 26) 9월 25일 『기효신서』를 입수하도록 하고 이를 유성룡으로 하여금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에 유성룡은 이시발, 한교로 하여금 이를 번역하게 하고 모든 훈련을 『기효신서』에 따라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595년(선조 28) 6월 13일에는 『기효신서』를 인출하였고 이를 등서하여 내려보내기에 이른다.

한편 조선은 자체적으로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를 양성하면서도 명나라의 군사 중에서 무예에 숙달한 자를 조선에 머물도록 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이들은 ‘당병교사(唐兵敎師)’로 불렸는데, 『기효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의 군사를 훈련시켰다. 이는 당시 조선의 이완된 전투력을 생각해 볼 때 『기효신서』를 번역하고 이를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조선이 진실로 필요한 것은 전투에 직접 투입하여 쓸 수 있는 무예의 실기를 갖춘 군사의 양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1594년(선조 27) 1월, 선조는 명나라 군사 중에서 화포와 창검술에 능한 자 3~4인이 조선에 머물러 군사를 가르쳐 줄 것을 청하여 이때부터 당병교사들이 초빙되어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러한 당병교사를 통한 훈련은 활발히 진행되는데, 당시 활동 중인 당병교사는 호여화(胡汝和)·왕대귀(王大貴)·이이(李二)·장육삼(張六三) 등 12명으로 개개인의 장기를 바탕으로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병교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선조는 이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598년(선조 31) 2월 선조가 명나라 제독 마귀(馬貴)에게 조선군의 전장에서의 활약을 묻는 물음에 답하여 “조선 포수들이 적을 많이 명중시켜 가상하나 다만 그 수가 적은 것이 한스럽다.”고 한 것과 같이 조선의 포수는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선조실록』 31년 2월 11일).

의의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구사하는 화기의 위력과 단병기의 효과를 실감하면서 『기효신서』에 수록된 척계광의 병법을 적극 수용했다. 선조는 이 책을 입수한 뒤 유성룡(柳成龍) 등에게 연구해 우리말로 번역하도록 했다. 요컨대 『기효신서』는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을 막을 수 있는 새로운 병법 및 군사 체계를 모색하던 조선에게 매우 적합한 모델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후 조선은 이를 통해서 새로운 전술과 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조선후기 군사 훈련 및 군대 편성에 『기효신서』의 영향력은 매우 컸고, 『기효신서』를 조선의 풍토에 뿌리내리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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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학지남(兵學指南)』
  •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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