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고리(赤古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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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바지와 치마에 대응되는 짧은 상의의 총칭.

개설

저고리는 남성이나 여성이 하의 위에 입는 가장 기본이 되는 상의이다. 저고리의 한자 표기인 ‘赤古里’라는 기록은 ‘겹막음[裌隔音]’이라는 또 다른 저고리 명칭과 함께 1420년(세종 2) 9월 13일 세종의 모후인 원경왕후천전의(遷奠儀)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남자 저고리는 바지와 함께 입는 기본적인 옷으로 포(袍)의 받침옷으로 사용되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길이이므로 옆선에 20㎝ 정도의 트임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 외의 별다른 장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변화도 적었다.

반면에 여자 저고리는 겉옷의 성격이 강하여 무늬 있는 비단 등 좋은 옷감을 사용하였으며 깃이나 곁마기, 끝동, 고름 등에 이색의 장식을 한 저고리가 성행하였다. 또한 시대에 따라 길이와 품의 정도 등에 변화가 있었으며 장식 부분에 민감한 변화를 보이는 시대적인 특징을 보인다. 16세기 저고리는 큼직한 크기에 길이도 50~80㎝에 이르는 긴 길이였으며, 넓은 목판깃에 짧고 좁은 고름이 달렸다 17세기의 저고리는 신체에 좀 더 맞는 형태로 변화하였으며 18세기 저고리는 치마허리가 드러날 정도로 짧아지고 소매통도 좁아지면서 몸에 밀착되는 특징을 보인다. 19세기 이후 20세기 초까지는 역사상 가장 짧은 저고리가 입혀졌다.

여자들이 꾸밀 때는 ‘저고리 3칭(稱)’이라고 하여 세 벌의 저고리를 겹쳐 입었다. 안에는 분홍이나 보라색 저고리를 속저고리로 입고 그 위에 일상적으로 입는 저고리를 입는다. 젊은 사람은 대체로 송화색 저고리를 즐겨 입었으며 나이가 든 부인은 옥색 저고리를 흔히 입었다. 이 중간 저고리에 회장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위에 다시 초록색 견마기나 당의를 예복으로 입었다. 견마기보다 길이가 긴 당의는 겨드랑 아래로 길게 트인 것이 특징이며 왕실에서는 명절이나 의례 때 입는 당의에 직금(織金)을 하거나 부금(付金) 장식을 해서 입었다.

연원 및 변천

‘저고리’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지만 착용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 중 남자 저고리 명칭은 저고리 외에 고도(古道), 과두(裹肚), 단삼(單衫), 단삼아(短衫兒), 소단유(小短襦), 유의(襦衣), 장삼아(長衫兒), 적삼[赤衫, 尺衫], 한삼(汗衫) 등의 기록이 보이며 왕조 말기의 궁중발기에는 저고리, 겹저고리, 핫저고리, 누비저고리, 동저고리, 의대, 동의대, 적삼, 한삼 등의 명칭이 보인다. 남자의 저고리는 속옷으로서의 역할을 하였기에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여자 저고리는 남자 저고리와는 달리, 소저고리[小赤古里], 단저고리[短赤古里], 회장저고리(回裝赤古里), 소오자(小襖子), 견마기[裌隔音], 액마기[腋亇只], 장저고리[長赤古里], 당저고리[唐赤古里], 고의[串衣], 소고의[小串衣], 적삼(赤衫), 소적삼(小赤衫), 한삼(汗衫)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왕실에서는 같은 옷일지라도 신분에 따라 다른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여자 저고리는 겉옷의 성격이 강하여 다양한 명칭과 함께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여자 저고리는 세 가지 성격의 저고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는 속저고리와 저고리를 입었으며 예를 갖추어야 할 때는 그 위에 예복용 겉저고리를 더 입었다. 예복용 겉저고리에는 견마기[肩莫只, 絹莫只]라고 하는 것과 당의(唐衣)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당의는 길이가 긴 저고리로 옆선에 긴 트임이 있었으며 견마기는 저고리와 당의의 중간 길이의 저고리를 말한다.

당의의 경우, 조선후기로 갈수록 품은 좁아졌지만 길이는 여전히 길었다. 저고리는 조선후기로 가면서 품도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길이도 짧아졌다. 조선후기에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졌다고 하는 것은 속저고리와 그 위에 입는 저고리, 견마기의 길이가 짧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8세기에는 치마허리가 드러날 정도로 저고리가 짧아지고 소매통이 좁아졌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이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는 여자 저고리의 소매가 좁아지고 길이가 짧아진 것을 개탄하였다. 특히 이덕무(李德懋)는 창기(娼妓)들의 아양 떠는 자태를 보고 남자들이 처첩에게 권하여 전해진 것이라고 하여 부인들의 저고리가 기생의 옷에서 유래하였다고 하였다. 19세기 이후 20세기 초까지 저고리는 더욱 짧아졌으며 개화기 이후 선교사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여학생들의 교복 개량을 계기로 저고리 길이가 다시 길어졌으며 구성법에 따라 겹저고리, 반회장저고리, 회장저고리, 박이 겹저고리, 깨끼저고리, 고도저고리, 색동저고리, 동그래저고리 등으로 구분되었다.

형태

남녀의 저고리 구조는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좌우의 등솔기로 연결되는 길 2장과 좌우 소매, 앞길 중심선에 달리는 좌우의 크고 작은 섶 하나, 그리고 겉깃과 고대, 안깃으로 이어지는 긴 길이의 깃 한 장으로 구성된다. 옷에 따라서는 겨드랑이에 무(武)가 달리기도 하고 겨드랑이 부분의 장식인 곁막이가 달리기도 한다. 각 부분이 연결되어 몸통이 완성되면 각자의 치수에 맞추어 좌우 앞길의 섶과 몸판에 고름을 달아 교임형(交袵形)으로 입는다. 왼쪽 섶이 오른쪽 섶을 덮는 우임(右衽) 방식으로 여민다.

남자의 저고리는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으나 겉옷으로 착용하는 여성들의 저고리는 다양한 길이의 저고리가 있었으며 장식 방법도 다채로웠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가 점차 짧아졌고 몸에 밀착되는 형태로 변화된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저고리 길이는 50~80㎝ 정도로 길었는데, 긴 저고리와 짧은 저고리, 그 중간 길이의 저고리가 공존하였다. 특히 긴 저고리는 겨드랑이 아래로 긴 트임이 있었다. 1464년(세조 10) 상원사 문수보살상 복장물(腹藏物)인 장씨(張氏) 회장저고리(중요민속자료 제219호)는 소색 명주 바탕에 아청색 연화문단으로 깃과 끝동을 두르고 소매와 겨드랑이 삼각 무를 남색 화문단으로 장식한 단저고리[短赤古里]이다. 반면에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제시되어 있는 기녀(妓女)의 ‘남저고리[藍赤古里]’는 긴 저고리에 해당된다. 깃, 끝동, 겨드랑이[腋間] 부분을 금사를 넣어 짠 비단인 금선(金線)으로 장식하고 있는데 저고리 길이가 1척 5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에도 저고리는 긴 저고리와 짧은 저고리가 공존하였다. 그러나 전 시대보다 품이 좁아지고 짧아지면서 점차 곡선화되었다. 18세기에는 치마허리가 드러나게 짧아지고 소매통이 좁아지며 몸에 밀착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18세기 풍속화에서 당시의 모습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에는 복식사상 가장 짧은 형태의 저고리를 입었다.

용도

저고리는 왕실은 물론, 모든 남녀의 상의 중 가장 기본적인 옷이다. 남자 저고리는 포(袍) 안에 입는 속옷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단순하며 형태의 큰 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반면에 여자 저고리는 치마와 함께 입는 겉옷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저고리 종류가 다양하였다. 옷의 구성이나 옷감 사용에 따라 일상적으로 입는 저고리와 의례용으로 착용하는 저고리로 구분되었다. 견마기와 당의가 예복으로 사용되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는 견마기로 추정되는 덕온공주(德溫公主)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견마기는 당의에 비하여 좀 더 가벼운 의례에 입었던 옷이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의하면, 여자들이 연회복(燕會服)으로 입는 녹색과 자색의 ‘방장의(旁障衣)’가 있는데 그 옷이 ‘겻마기’라고 하였다. 방장의는 옆이 막힌 옷이다. 궁중에서 초간택과 재간택 때 처자들은 예복으로 견마기를 입고 입궐하였다.

또한 1795년(정조 19)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내인들이 자색 고름을 단 초록 화주(禾紬) 견마기[傍莫只]를 입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1847년(헌종 13)의 『경빈김씨가례절차(慶嬪金氏嘉禮節次)』에 따르면 가례 후 헌종과 경빈김씨가 야담상(夜餤床)을 받을 때 김씨가 견마기[肩莫只]에 대란치마[大襴裳]를 입었다. 1887년(고종 24) 『정해진찬의궤(丁亥進饌儀軌)』에는 선천(宣川) 여령(女伶)들이 흰색 팔량주(八兩紬) 거들지를 단 초록 팔량주 견마기[絹莫只]를 입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의는 견마기보다 예를 갖춘 저고리였다. 당의는 녹색과 자색, 두 종류가 있었는데 안감은 반홍색[磻紅色]을 사용하였다. 반가 부인이나 처자들은 주로 녹색 당의를 입었으나 왕실 여성들은 녹색 외에 자주색 당의도 착용하였다.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계례(筓禮)를 치르는 처녀가 당의를 입는다고 하였는데 신부가 착용하기도 하였다. 『병와집(甁窩集)』에는 외명부가 진현 때 웃옷으로 입는다고 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상궁과 시녀도 초록 화주 당의를 착용한 기록도 보인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20세기에는 미혼 여성의 저고리는 노랑색, 혼인하여 폐백을 드린 후에는 신랑 집에서 함에 넣어준 초록색 감으로 저고리를 만들어 입었다. 따라서 ‘녹의홍상(綠衣紅裳)’은 신부를 상징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온다. 1980년대 이후 결혼식에는 신랑 어머니의 저고리는 옥색이나 하늘색, 신부 어머니의 저고리는 분홍색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참고문헌

  • 『경빈김씨가례절차(慶嬪金氏嘉禮節次)』
  • 『당서(唐書)』
  • 『병와집(甁窩集)』
  • 『북사(北史)』
  • 『수서(隋書)』
  •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정해진찬의궤(丁亥進饌儀軌)』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경운박물관 편, 『그리운 저고리』, 2007.
  • 고려대학교 박물관 편, 『파평윤씨 모자 미라 종합연구 논문집 2』, 2003.
  • 박성실, 「回粧赤古里와 肩亇只 再考」, 『국당손경자교수정년기념논총』, 1996.
  • 박성실·조효숙·이은주, 『조선시대 여인의 멋과 차림새』,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 柳喜卿,『한국복식사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0.
  • 이소담, 『재봉교본』, 고려문화사, 1948.
  • 허흥식 외, 『高麗의 佛腹藏과 染織』, 계몽사,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