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령(女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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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과 지방관아에서 신역(身役)으로 악가무(樂歌舞)를 담당한 여자 음악인.

개설

조선시대에는 관기(官妓)·기(妓)·기녀(妓女)·기생(妓生)·기악(妓樂)·여공인(女工人)·여기(女妓)·여악(女樂)·창기(娼妓)·창기(倡妓) 등도 여령(女伶)을 가리키는 용어로 불리기도 하였다. 여령은 한양에 있는 경기(京妓)와 지방에 있는 향기(鄕妓)로 구분되었다. 여령의 신분은 공천(公賤)으로 50세가 되어야 기역(妓役)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자손 또한 여령이나 악공(樂工) 또는 무동(舞童)이 되어 그 일을 세습해야만 했다. 서울에서 활동한 여령은 지방관아에 속한 외방여기(外方女妓) 중에서 재예가 뛰어나 선발되어 올라온 기녀들로, 나라에서는 봉족(奉足)을 정해 이들의 생활을 돕도록 하였다.

담당 직무

여령의 신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국가의 크고 작은 연향에서 정재(呈才)를 비롯한 악가무를 공연하는 일이다. 조선시대 전기에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된 여령은 외연(外宴)·내연(內宴)·사객연(使客宴)·사악(賜樂)·친잠례(親蠶禮)·중궁하례(中宮賀禮)와 왕실의 각종 연향 등에서 악가무를 공연하였으며, 왕이 거둥 후 환궁할 때는 노상(路上)에서 교방가요(敎坊歌謠)를 올렸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 후기에는 장악원에 소속된 여령이 없었으므로, 서울에서는 여령이 내연 및 명부(命婦)가 내전에 진하(進賀)할 때 악가무를 공연하는 역할을 했다(『광해군일기』 8년 8월 14일).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는 악공이 악기 연주를 담당했으므로, 여령의 주요 역할은 정재를 공연하는 것이었다.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화성의 봉수당에서 혜경궁을 위해 연회를 베풀 때도 여령이 정재를 공연하였다(『정조실록』 19년 윤2월 13일). 한편 지방관아에 속한 외방여령은 사신이 경유하는 고을에서 베푸는 연향, 변방의 군사를 위한 위로연, 지방관아의 연향 등에서 악가무를 공연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의장(儀仗)을 갖추고 왕과 왕실 가족을 시위(侍衛)하는 일이다. 평상시에 시위하기도 하였으며, 연향 때 하기도 하였다. 성종대에는 대왕대비전·왕대비전·대전에 각기 1명씩 여령이 배정되었으며, 그들에게 옷·음식·월급을 주도록 하기도 했다(『성종실록』 1년 2월 6일).

변천

여령은 문헌상 고려시대부터 등장하였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여기를 하악(下樂)이라고 하여 3등급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왕이 항상 쓰는 대악사(大樂司)에 260명, 관현방(管絃坊)에 170명, 경시사(京市司)에 300여 명의 여령이 소속되어 악가무의 공연 활동을 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인 세종대에는 서울의 음악 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한 여령이 100명 남짓이었는데, 1485년(성종 16)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150명으로 규정되었다. 외방여령은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평안도·황해도·함경도·경상도·충청도 등지에 두었는데, 큰 고을의 경우 그 수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인조대에 여령 제도에 변화가 생겼다.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울에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장악원 소속의 여령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연향에 맞추어 외방여령을 뽑아 올렸다가 연향이 파하면 본래의 외방으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여령의 역할이 조선시대 전기에 비해 축소되었다. 또한 18세기 후반부터는 궁중 연향에서 의녀와 침선비(針線婢)가 정재 여령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여령은 악가무의 기예를 통해 사회에 기여했지만, 때로는 풍기 문란의 병폐를 유발하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여령은 내연에만 활용하고, 외연에서는 남악(男樂)을 쓰자는 논의가 생겨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5년 10월 21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고려도경(高麗圖經)』
  •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민속원, 2003.
  • 조경아, 「조선후기 연향 의궤를 통해 본 정재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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