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방가요(敎坊歌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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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교방에서 가요를 헌상하는 의식.

개설

임금이 환궁할 때 연도에서 대가(大駕)를 맞는 의식 중 하나이며, 교방의 여기(女妓)들이 송축의 내용을 담은 가요를 올리는 절차 모두를 교방가요(敎坊歌謠)라고 한다. 조선전기에는 교방가요가 종종 연행되었으나(『세종실록』 15년 4월 12일) (『명종실록』 22년 6월 12일), 중기 이후에는 급격히 축소되어 조선말에는 시행된 예가 없다.

내용 및 특징

교방가요는 『악학궤범』의 권5 시용향악정재도의(時用鄕樂呈才圖儀)에 교방가요 항목을 통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우선 교방가요의 초기 배열 모습은 다음과 같다. 대가를 맞이하기에 앞서 연도에 침향산과 지당판을 설치한 후, 기녀 100명이 반으로 나뉘어 침향산의 좌우로 선다. 침향산은 산 모양을 만들어 사탑·승불·고라니와 사슴을 골짜기에 깃들이고, 앞부분에는 지당(池塘), 즉 못에 난간을 두른 후 그 안에 연화통을 설치하고 좌우에 모란 꽃병을 설치한 구조물이다. 특히 밑에 윤통을 달아 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길 왼쪽에 가요축이 담긴 함을 올려놓을 가요축함탁(歌謠軸函卓)을 설치하고 나이 어린 여기 둘을 탁자 좌우에 배치한다. 대가가 함탁에 이르면 전부고취(前部鼓吹) 악공은 기녀 뒤에 25명씩 좌우로 서서 「여민락령」을 연주하고 기녀들은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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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을 치면, 도기(都妓)가 염수 족도하고 첨수로 축을 받든다. 승지가 축을 임금에게 전하면 음악이 그치고 학무와 연화대무가 연행된다. 정재가 끝난 후 침향산 뒤에서 전·후부고취가 환궁악을 연주하면 침향산을 화전벽 뒤로 끌어가고, 대가가 전진하다 머무르면 또 정재를 연행한다.

정재가 없는 경우에는 여러 기생들이 벌려 서 있다가 음악을 연주하면 가요를 바친 뒤에 동서로 갈라서고, 대가가 지나가면 전후의 고취가 연주하며 시위와 대가가 궐내로 들어가면 음악이 그친다.

변천

『고려사』 권43에 따르면, 1371년에 공민왕이 태묘에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방에서 가요를 지어 올렸다고 한다. 교방뿐만 아니라 성균관과 외학에서도 가요를 지어 올렸다. 따라서 교방에서 가요를 올리는 전통은 고려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의 거가환궁 영접 행사에서는 교방과 성균관이 가요를 올렸으나, 조선에서는 교방, 기로, 유생이 가요를 올렸다는 차이가 있다.

최고 통치자인 왕이 다양한 목적으로 출궁한 뒤 환궁하는 행위는 왕조의 존속을 의미하므로 상징적인 행사를 수반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교방가요를 포함한 대규모 공연 예술이 연행되는 거가환궁 영접 행사가 뒤따랐다. 그러나 침향산과 같은 거대한 구조물이 요구되는 교방가요는 검박함을 강조하는 조선의 통치 이념에 반하여 설행 여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고, 자주 생략되었다.

참고문헌

  • 『악학궤범(樂學軌範)』
  • 『교방가요(敎坊歌謠)』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