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로(尹師路)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23년(세종 5)∼1463년(세조 9) = 41세.]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부마. 봉작은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이다. 호는 과옹(果翁) 또는 주옹(周翁)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판광주 목사(判廣州牧使)윤은(尹垠)이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예빈시(禮賓寺) 판관(判官)이수상(李守常)의 딸이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그는 14세 때인 1436년(세종 18) 세종(世宗)의 서출 제 1왕녀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면서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다.[『세종실록』세종 18년 9월 4일] 얼마 후에 충의위 장(忠義衛將)이 되었고, 이후 여러 사(司)의 제조(提調)를 지냈는데, 힘써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1444년(세종 26) 자의대부(資義大夫)가 되었고, 그 다음해에 통헌대부(通憲大夫)로 승품되었다.[『세종실록』세종 26년 7월 1일, 세종 27년 11월 3일] 1450년(세종 32)에는 봉헌대부(奉憲大夫)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사신을 접대하였다. 그가 복명(復命)하기를, “처음 평양(平壤)에 이르니 마침 사신이 향교(鄕校)에 가려고 하여, 통사(通事)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의빈(儀賓)입니다. 전하께서 사신을 공경하여 특별히 보내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셨으니, 청컨대, 잔치를 받은 뒤에 향교(鄕校)에 가소서.’ 하니, ‘전하의 은혜에 감사함이 이를 데 없소.’ 하였습니다. 이 앞서는 사신이 관대(冠帶)를 갖추지 않았었는데 이 잔치에 이르러 비로소 사모(紗帽)와 품대(品帶)를 갖추었습니다.”하였다.[『세종실록』세종 32년 1월 26일]

1452년(문종 2) 문종이 돌아간 후에는 수릉관(守陵官) · 빈전 도감(殯殿都監) 제조가 되어, 3년 동안 능을 지키면서 공경을 다하였데,[『보한재집(保閑齋集)』 권17 「영천부원군 윤공 신도비(鈴川府院君尹公神道碑)」] 이로 인해 12월 숭덕대부(崇德大夫)가 되었다.[『단종실록』단종 즉위년 12월 11일] 1454년(단종 2)에는 광덕대부(光德大夫) 영천위(鈴川尉)가 되어 과전 70결을 받았다.[『단종실록』단종 2년 7월 26일]

세조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에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도운 공로로 수충 위사 동덕 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세조실록』세조 1년 9월 20일] 1456년(세조 2)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의금부(義禁府) 제조를 겸하면서, 세조의 찬탈에 반대하던 일파를 추국(推鞠)하여 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이후 성록대부(成祿大夫)에 가자되었고, 중추원(中樞院)영사(領事)가 되었다. 1458년(세조 4) 8월 영천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전지(田地) 1백 50결(結)등을 상으로 받았다. 1459년(세조 5)에는 영천부원군윤사로를 좌상 대장(左廂大將)으로 삼고, 행 호군(行護軍)양성지(梁誠之)로써 우상 대장(右廂大將)으로 삼아 후원(後苑)에서 습진(習陣)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왕이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행(巡幸)할 때에 윤사로와 권람(權擥) 등을 수상(守相)으로 삼아 도성(都城)에 머물며 서무(庶務)를 총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세조실록』 6년 10월 4일)

1460년(세조 6) 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3년 상을 마치기전에 상제의 몸으로 1461년 불경의 국역과 판각을 관장하던 간경도감(刊經都監)도제조(都提調)에 임명되었다. 그해에 경복궁(景福宮)을 수즙(修葺)하기위하여, 별도로 설치된 수리도감(修理都監)의 도제조에 임명되었다. 실록에는 1463년(세조 9) 12월 28일 돌아갔다고 기록되어있으나,[『세조실록』세조 9년 12월 28일「윤사로 졸기」] 비문에는 1464년(세조 10) 갑신년(甲申年) 3월 19일로 기록되어있다.[『보한재집』 권17 「영천부원군 윤공 신도비」]

성품과 일화

윤사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보한재집』 권17 「영천부원군 윤공 신도비」] 또 성질이 영오(穎悟)하여 남의 뜻을 잘 해석하였으나 재리(財利)를 논의할 때에는 조그마한 이익도 남기지 않았다. 윤사로가 매번 왕을 알현 할 때마다 낡은 모자에 때 묻은 옷을 입으니, 세조가 항상 말하기를, “그 사람이 탐욕(貪欲)하고 인색하여 갑자기 부자가 되었으니, 거만(鋸萬)의 돈을 쌓았을 것이다.”고 하였다.[『세조실록』세조 9년 12월 28일「윤사로 졸기」] 그런데 세조의 말대로 그는 식리(殖利)에 능하여, 외방의 농장(農莊)이 있는 곳에 여러 만석(萬石)을 쌓아 놓고, 서울 제택(第宅)의 창고도 굉장하여, 그 재산이 몇 리 밖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세조실록』세조 3년 10월 24일]

세조는 왕위찬탈에 공로를 세운 계양군(桂陽君)과 익현군(翼峴君)을 종친 중에서 가장 친근하고 중하게 여겼는데, 윤사로도 이에 못지않게 대우하여 왕의 침소를 막힘없이 출입하도록 하였으며, 그에게 크게 의지하였다.[『보한재집』 권17 「영천부원군 윤공 신도비」] 세조에게 총애(寵愛)를 받았던 윤사로를 성질이 요마(幺麿)하면서도 자못 경오(警悟)한 사람이었다고[『세조실록』세조 3년 10월 24일]하는 반면에, 선비에게 굽신거리고 교만(驕慢)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자못 많이 그를 따랐다.[『세조실록』세조 9년 12월 28일「윤사로 졸기」]고 평가하기도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묘소는 장단현(長湍縣)에 있고,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보한재집(保閑齋集)』 권17 「영천부원군 윤공 신도비(鈴川府院君尹公神道碑)」] 부인은 세종의 딸 정현옹주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다. 1남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사직(司直)윤반(尹磻)이고, 2남은 현의교위(顯毅校尉) 행(行) 사정(司正)윤인(尹磷)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보한재집(保閑齋集)』
  • 『농암집(農巖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역사(海東繹史)』
  • 『홍재전서(弘齋全書)』
  • 『눌재집(訥齋集)』
  • 『삼탄집(三灘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