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도감(修理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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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 종묘 등의 수리를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수리도감은 궁궐 등의 수리가 필요할 때 설치한 관청으로서, 세종대부터 설치되었던 사례가 확인된다. 공역의 성격에 따라 담당 관원의 직급은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등으로 달랐으며, 관원의 수 등도 일정하지 않았다. 공역의 규모가 작을 때에는 수리도감 대신 수리소(修理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때에 따라서 개수도감(改修都監) 또는 수개도감(修改都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가장 이른 시기에 설치된 수리도감은 1442년(세종 24)에 설치된 것이었다. 이때의 수리도감은 궁궐이 아니라 헌릉(獻陵)·건원릉(健元陵)·제릉(齊陵) 등 왕릉을 수리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후 세조대에는 경복궁을, 성종대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종묘 등을 수리한 바 있다. 성종대 초반 경복궁 경회루 등을 수리할 때에는 공역 담당 기관으로 선공감(繕工監)이 있으니 수리도감을 혁파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수리도감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484년(성종 15) 창경궁을 지을 때에도 창덕궁과 수강궁(壽康宮)을 수리한다는 명목의 연장선상에서 수리도감을 두어 공역을 마쳤다.

연산군대는 수리도감이 가장 확장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궁궐을 수리하고 궁궐 부근의 인가를 철거하였다. 도성 곳곳에 누각을 더 지어 강가나 물굽이를 확장하고 길을 내었다. 이후 수리도감은 중종대에 동궁수리도감(東宮修理都監)이 설치된 적이 있을 뿐 거의 설치되지 않았다.

조직 및 역할

수리도감은 대체로 도제조, 제조 등 당상(堂上)과 낭청(郎廳), 기타 서리(書吏)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수리 내역과 중요도 등에 따라 참여하는 관원의 직급이 달랐고, 여러 직급의 관원들이 겸직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인조대 이괄의 난 등으로 창덕궁, 창경궁이 큰 피해를 입자 1633년(인조 11)과 1647년 창덕궁, 창경궁, 창덕궁의 동궁 저승전(儲承殿)·평선당(平善堂) 등을 수리할 때 수리도감을 설치하였다. 정조대 창덕궁 수리와 경희궁 혼전 수리 등을 위해서도 수리도감이 설치된 바 있다. 정조대 이후로는 수리도감이 설치된 기사가 보이지 않는데, 궁궐 등의 수리에 관련된 것이라도 영건도감(營建都監)이나 중건도감(重建都監)이 설치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가장 마지막에 설치된 사례는 1777년(정조 1) 창덕궁을 수리할 때의 것이다. 이 밖에 수개도감이라는 이름으로 1486년(성종 17)에 설치된 예가 있고, 1677년(숙종 3)에는 숭릉 사초 보수를 위해 개수도감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된 적이 있어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리도감의 활동에 관련된 기록으로는 수리도감의궤가 전한다. 인조대의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와 『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慶宮修理都監儀軌)』, 효종대의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 등이 대표적이다.

참고문헌

  • 서울대학교 도서관 편,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서울대학교 도서관, 1978~1987.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4~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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