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수도감(改修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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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릉이나 종묘, 책보(冊寶) 등의 수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서.

개설

개수도감은 조선시대 왕릉이나 종묘 등에 수리할 곳이 생기거나 책보 등을 수리할 일이 있을 때 이를 담당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서이다. 왕릉을 수리하기 위해 설치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역의 성격에 따라 담당 관원의 직급은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등으로 달랐으며, 관원의 수 등도 일정하지 않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건축물 등을 수리할 때면 개수도감이나 수리도감(修理都監)과 같은 임시 기관을 설치하였는데, 둘의 차이는 분명치 않다. ‘수개도감(修改都監)’이라고 명명한 경우도 있는데, 개수도감과 수개도감은 대체로 서로 통용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전해지는 사례로 볼 때 개수도감의 경우는 대부분 왕릉 수리와 관련하여 설치되었다. 그러나 책보나 지석(誌石), 종묘, 영녕전(永寧殿) 등을 수리할 때에도 개수도감을 설치한 예외 사례가 있다.

조선시대 왕릉은 사초(莎草)가 무너지거나 봉분이 함몰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왕릉을 처음 조성할 때 봉분의 흙을 단단히 다지지 않았거나, 계절이 바뀌며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개수도감은 이를 복구하는 작업을 담당하곤 하였다. 왕릉 공역과 관련하여 설치된 개수도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1699년(숙종 25) 설치한 장릉개수도감(莊陵改修都監), 1744년(영조 20) 명릉개수도감(明陵改修都監), 1783년(정조 7) 원릉개수도감(元陵改修都監), 1804년(순조 4) 건릉개수도감(健陵改修都監), 1899년(광무 3) 수릉능상사초개수도감(綏陵陵上莎草改修都監) 등을 들 수 있다.

왕릉의 개수 외에도 종묘와 영녕전을 확장·개수할 때에도 개수도감이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현종대 영녕전과 영조대 종묘를 확장할 때이다. 이 외에도 1615년(광해군 7)에서 1618년까지 광해군의 생모 공성왕후(恭聖王后)의 성릉(成陵) 지석을 개수할 때, 1687년(숙종 13) 인조비(仁祖妃)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책보를 개수할 때에도 개수도감을 설치한 바 있다.

개수도감이 아닌 ‘수개도감’의 사례도 여러 건 발견된다. 1486년(성종 17) 노비 추쇄를 교정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이 외에도 광해군대 목릉(穆陵) 등을 개수할 때 등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현종대 영녕전 개수의 경우 수개도감과 개수도감이라는 명칭이 함께 기록에 등장하고 있어 두 가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개수 사례에 대하여 의궤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광해군대 이후의 개수 사례에 대해서는 의궤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조직 및 역할

개수도감은 대체로 도제조, 제조 등 당상(堂上)과 낭청(郎廳), 기타 서리(書吏) 등으로 구성되었다. 개수의 내역, 중요도 등에 따라 참여하는 관원의 직급이 달랐고 여러 직급의 관원들이 겸직하였다. 예를 들어 1744년 명릉개수도감의 경우, 도제조에 영의정김재로, 제조에 호조 판서김약로와 예조 판서이종성이 임명되었고, 낭청으로 예조 정랑과 선공감 가감역이 임명되었다. 이 밖에도 겸감역 2명과 서리·고지기·사령·서원(書員) 등이 차출되었다.

변천

도감은 임시로 설치했다가 공역을 마친 후 관련 관원들에게 상을 주고 혁파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설치되고 폐지되었다. 실록에서 개수도감이라는 이름은 1677년(숙종 3) 숭릉 사초 보수를 위해 설치된 예가 처음이지만, 수개도감이라는 이름으로 1486년에 설치된 사례가 있어 일찍부터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마지막에 설치된 사례는 1899년 수릉의 사초를 개수할 때의 것이다.

참고문헌

  • 『명릉개수도감의궤(明陵改修都監儀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4~2004.
  • 서울대학교 도서관 편,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서울대학교 도서관, 1978~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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