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소(衛將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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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지정된 위치에 설치하여 숙위(宿衛)를 담당하는 위장(衛將)과 군인들이 근무하던 직소(直所).

개설

위장소는 궁궐마다 동서남북의 정해진 위치에 있는 건물로, 숙위에 임하는 위장과 군사가 근무하기 위해 설치한 경비초소와 같은 곳이다. 조선전기에는 위장소의 근무 인원을 도총부(都摠府)에서 관할하였으며, 군영이 설치되는 조선후기에는 병조(兵曹)에서 주관한 것으로 보인다. 위장소의 지휘자인 위장들은 조선전기부터 양계(兩界)의 수령(守令) 중에서 무신(武臣)으로 임명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오위장(五衛將)이 위장이었다. 위장소에서는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한 것 이외에도 야간 통행이 금지된 시간에 궁궐 문을 통행한 자들을 가두어 두고 단속하는 일까지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환관을 보내 위장소의 장병(將兵)들을 점검하기도 하였으며, 후기에는 승지와 선전관을 주로 보내 점검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위장소는 조선초기부터 설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위장소의 설치와 정착은 세조대부터 성종대로 생각된다. 1459년(세조 5) 병조에서 입직(入直)한 장병의 숙위와 순찰하는 절차를 보면, ① 동(東)·남(南)·서(西)에 3소(所)를 설치하여 군사들이 장수들의 점고(點考)를 받는 분소(分所)에 입직하게 할 것, ② 위장은 각기 3명이 입직할 것, ③ 긴급한 일이 있으면 패(牌)를 내어서 위장소에 면대(面對)해서 전달할 것 등이다.

1469년 성종은 즉위하면서 위장소를 담당하던 위장의 임기를 1년으로 지정하였으며, 1470년에는 궁궐 안의 밤 순찰을 위장이 전담하게 했다. 북쪽은 동소(東所)·서소(西所)·북소(北所)의 위장이 담당하고, 남쪽은 남소(南所)의 위장과 응양위장(鷹揚衛將)·내금위장(內禁衛將)이 시간을 나누어 번갈아 돌아다니게 하였다.

1491년(성종 22) 「숙위절목(宿衛節目)」에 궁궐 동서남북의 소를 위장소라고 칭하되 그 위장을 모소수장(某所守將), 혹은 주장(主將)이라고 칭하면서 위장소의 운영이 정착되었다. 위장소에서는 외부 세력의 침입을 막는 경호뿐만 아니라 궁궐 담장의 보수와 유지도 담당하였다.

조직 및 역할

1491년 「어서숙위절목(御書宿衛節目)」을 정하여 위장소의 운영을 확대하였다. 「어서숙위절목」에 따르면, ① 재상(宰相) 8명을 뽑아서 돌아가며 4곳의 위장소에 입직하게 하고, ② 매 위장소에 종사관(從事官) 1명을 보내며, ③ 위장 이하는 그 절도(節度)를 듣고, ④ 낮에는 선전표신(宣傳標信)에 따라, 밤에는 부험(符驗)에 따라 발군(發軍)하라고 하였다.

성종대 이전에는 입직한 군사가 시간이 되어 교대하는 체직(遞直) 때나 돌아가며 식사하는 식대(食代) 때, 남소(南所)의 부장(部將)이 도총부에 가서 보고한 후에 패를 내어 돌려가면서 보여야 했다. 1493년 새로 지정된 교대 규정을 보면, 부장과 수문장(守門將) 등은 반드시 표신(標信)이 있어야만 불러올 수 있게 하였다. 군사의 체직과 식대 등의 패는 위장소에 있으므로, 체직과 식대할 때가 되면 부장이 먼저 도총부에 알린 후에 위장에게 보고하고서 패를 내어 돌려가면서 보였다. 이 패는 도총부에서 만들었으며, 한 면에 ‘아무 곳[某所]’이라 쓰고 다른 한 면에는 ‘식대(食代)’, ‘체직(遞直)’이라고 기재하였다.

패를 이용하여 위장소를 점검하는 것은 수시로 있었다. 왕은 야간에 위장소 장병들의 숙위 태세를 직접 점검하기도 했는데, 이때 패를 이용하였다. 1508년(중종 3) 중종은 저녁 7시에서 9시쯤[一更] 버드나무로 임시 표신을 만들어서 글자를 붉게 썼다. 그리고 이것을 선전관(宣傳官)이 위장소에 가지고 가서 위장이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경회문(慶會門) 밖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때 위장소의 장병들이 표신에 있어야 하는 왕의 서명[御押]과 선전자호(宣傳字號), ‘신(信)’이라는 글자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모여 왕의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년 10월 15일).

그런데 위장소 위장들의 근무와 군사 통솔은 항상 엄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 적(敵)이 궁궐에 몰래 잠입하는 사건보다는 수문이 엉성하여 외부인이 쉽사리 궁내로 들어오는 일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전기인 1524년의 경우, 위장소에 근무하는 군사들이 근무 기간에 고향에 내려가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위장이 군사들을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궁궐의 사소(四所)를 담당하던 위장들은 노쇠하거나 남항(南行)인 사람이라 위장소를 책임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중종실록』 19년 7월 8일).

현종대인 1671년에는 어린 군사들이 충군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469년(예종 1)에는 위장소의 위장이 술에 취해 누워 있으면서 점고를 하러 온 환관을 무시하기도 하였다(『예종실록』 1년 7월 19일). 심지어 1734년(영조 10)에는 야간에 숙장문(肅章門)의 군졸이 화재로 죽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규정대로라면 병조와 위장이 전적으로 궁궐 안을 순찰하면서 불을 금해야 했는데도 전혀 살피지 않은 결과였다(『영조실록』 10년 1월 5일). 이 외에도 정조 즉위 초인 1776년에는 위장들이 실수로 창덕궁의 차비문(差備門)을 열어 놓아 외부인들이 거리낌 없이 드나들기까지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20일). 1778년 11월에는 연양문(延陽門)의 물시계를 전보(傳報)하는 군졸이 통행금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경고(更鼓)를 잘못 쳤다. 이 때문에 통행금지가 끝났다는 파루(罷漏)를 알려 궁성 문을 일찍 열게 하는 실수까지 하였다(『정조실록』 2년 11월 28일).

그러나 위장들의 처지는 사회적으로 열악하지 않았다. 1711년(숙종 37) 위장소의 오위장과 위소 군사들의 하인들이 사사로이 패를 만들어 도망간 노비를 허가 없이 잡으러 다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위장소 군인들의 가솔들이 공권력을 빙자할 정도라면 그들의 상전인 위장은 더 큰 위세를 부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위장소 운영은 철종대인 1859년(철종 10)에 마지막으로 변하였다. 물론 고종대 근대적 군제로 전환하면서도 변하지만, 조선식 군제하에서는 철종대가 마지막이었다. 당시 개편된 위장소의 기능을 보면, 사소(四所)의 위장·부장과 홍화문(弘化門)·동룡문(銅龍門)·금호문(金虎門) 등의 입직 군사에게 새벽 3시에서 5시[五更] 이후로 각기 자기의 담당 구역[字內] 안에서 교대로 순찰하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로써 야간 순찰을 돌던 순졸(巡卒)만 힘들게 하는 폐단을 없앴다. 이후 고종대에 일본을 위주로 하는 외국군의 진주와 신식 군대의 채용으로 인해 위장소를 중심으로 하는 구시대적 궁궐 숙위가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온행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도성내 행행의 추세와 변화」, 『조선시대사학보』43, 2007.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행행시 궁궐의 숙위와 유도군 연구」, 『군사』6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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