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문(弘化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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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정문, 또는 한양 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동소문(東小門).

개설

홍화문(弘化門)은 처음 태조가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동북에 위치한 동소문의 이름이었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이후에 혜화문(惠化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 잘 알려진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창덕궁의 돈화문과 경희궁의 홍화문과 같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이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어 그 동쪽으로 명정문이 있고 또 그 동쪽에 홍화문이 동향으로 위치한다. 홍화문은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조성할 당시 정문으로 조영되었다. 궁궐의 정문은 궁궐에 들어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장소이며 궁궐을 나갈 때 배웅하는 장소가 된다. 사신을 영접하거나 왕이 이어했다가 돌아올 때 궁궐의 정문에서 지영(祗迎)하며, 왕이 이어하거나 국상이 발생하여 빈전에서 발인할 때 왕은 산릉까지 못갈 경우 궁궐의 정문에 나가 지송(祗送)하였다.

조선전기에는 홍화문 밖에서 무과 시험을 보거나 왕이 직접 참관하는 활쏘기 행사가 있었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창경궁에서는 다른 궁궐과 달리 왕실의 상장례가 많이 행해졌다. 따라서 홍화문은 발인을 지송하는 장소로 사용되거나 반우(返虞)하는 신주를 맞아들이는 지영의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홍화문의 다음의 세 가지로 사용되었다.

첫째, 무과 시험 장소로 활용되었다. 1538년(중종 33) 3월에 중종이 세자를 동반하고 홍화문 밖에 나가 무신이 활 쏘는 것을 관람하고 함춘원을 주제로 시를 짓도록 하는 시험을 보았다(『중종실록』 33년 3월 26일). 9월에는 말 타며 활 쏘는 행사(騎射)를 관람하고 유생들의 제술 시험을 보았다. 1561년(명종 16) 4월에도 왕이 홍화문 밖에 나가 문신에게 제술 시험을 보고, 활쏘기 시험도 보았다(『명종실록』 16년 4월 6일). 9월에는 인정전에서 문과전시(文科殿試)의 제목을 내주고 홍화문 밖에서 무과 시험을 보았다. 1583년(선조 16) 8월에도 인정전에서 별시 문과 시험을 출제하고 홍화문에 나아가 별시 무과 시험을 시행하였는데 기간은 3일간 이어졌다(『선조실록』 16년 8월 24일). 1619년(광해군 11)에도 활쏘기 시험을 시행하였다(『광해군일기(중초본)』 11년 10월 2일).

둘째, 백성과 소통하는 장소가 되었다. 1749년(영조 25) 8월에 왕이 홍화문의 이층 누각에 올라 왕세자를 거느리고 선비와 농민·수공업자·상인 등에게 진휼을 시행하였다. 떠돌이와 굶주린 자도 돌보았다. 또 왕이 지은 임문휼사민(臨門恤四民)의 30운(韻) 칠언 고시(七言古詩)를 내려 홍화문에 붙이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5년 8월 6일). 1750년 5월에는 홍화문에 나아가 백성들과 유생들에게 양역(良役)에 대한 의견을 묻고 들었다(『영조실록』 26년 5월 19일). 1757년(영조 33)에는 홍화문에서 회양(淮陽)과 김성(金城)에 살고 있는 떠돌이 백성을 만나고, 1758년에는 홍화문에 나아가 한양 도성의 70세 이상 노인을 만났다.

셋째, 조선후기 국상(國喪) 기간에 발인과 반우 행렬의 경로가 되었다. 1530년(중종 25) 이후 창경궁의 문정전에서 혼전 의례가 주로 설행되었다(『중종실록』 25년 9월 13일). 이에 따라 홍화문은 반우의 경로로 자주 사용되었다.

창경궁에서 상장례가 행해진 것은 1515년(중종 10)에 중종 비 장경왕후의 혼전이 창경궁에 조성되었을 때였다. 1530년에는 성종 비 정현왕후의 혼전을 문정전에 설치하였다. 이때 산릉에서 우주(虞主)를 받들고 돌아오는 반우 행렬은 선인문을 통해 들어왔다. 본래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정례였다. 하지만 명정문을 지나 명정전 남행각 광정문(光政門)을 통해 문정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계단이 많아 오르내려야 했다. 또한 길이 정전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가는 형상이었다. 그러나 선인문을 통해 문정전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곧은길이라 이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1659년(현종 즉위)에는 효종을 영릉에 장례하고 돌아와 홍화문을 거쳐 문정전에 봉안하였다. 1720년 숙종의 국장에서는, 서오릉의 명릉에서 돌아온 반우 행렬이 홍화문을 통해 명정문을 지나 명정전에 들었다가 문정전 뒤편에 위치한 건복문을 경유하여 문정전에 우주를 봉안하였다.

또 1688년(숙종 14) 장렬왕후의 빈전에서 발인하는 행렬이 환경전에서 재궁을 내어 빈양문을 지나 명정전에 들었다가 명정문을 통해 홍화문으로 궁궐을 나섰다. 홍화문에서 대여(大輿)가 대기하고 있다가 재궁이 나오면 대여에 싣고 산릉으로 향했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의 발인도 같은 경로로 행해졌으며 이때 세자는 홍화문에서 지송하였다. 1800년부터 환경전에서 꾸준히 빈전 의례를 행하면서 모든 재궁의 발인은 명정전을 지나 홍화문 앞에서 대여에 올라 산릉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왕 혹은 왕세자는 홍화문에서 지송하였다.

변천 및 현황

1483년에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성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창경궁이 소실되면서 홍화문도 소실되었다. 홍화문은 1616년(광해군 8)에 창경궁 재건 공사를 진행하면서 다시 건립되었고, 크고 작은 수리 과정을 거쳐 현재까지 이르렀다. 궁궐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대의 모습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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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를 갖추고 2층으로 조성되었다. 지붕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같이 우진각지붕이다.

참고문헌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동궐도 읽기』, 창덕궁관리소, 2005.
  •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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