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호(元昊)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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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호 |
한글표제 | 원호 |
한자표제 | 元昊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계승범 |
자 | 자허(子虛) |
호 | 관란(觀瀾), 무항(霧巷) |
시호 | 정간(貞簡)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본관 | 원주(原州) |
주거지 | 서울, 원주(原州) |
묘소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
증조부 | 원광명(元廣明) |
조부 | 원중랑(元仲浪) |
부 | 원헌(元憲) |
모_외조 | 원주 원씨(原州元氏) : 원천상(元天常)의 딸 |
형제 | 원황(元晃) |
처_장인 | 영월 신씨(寧越辛氏) : 신을현(辛乙賢)의 딸 →(자녀)4남 1녀 |
자녀 | (1자)원효행(元孝行) (2자)원효렴(元孝廉) (3자)원효건(元孝乾) (4자)원효곤(元孝坤) (1녀)오치종(吳致宗)의 처 |
저술문집 | 『관란유고(觀瀾遺稿)』 |
작품 | 「몽유록(夢遊錄)」, 「탄세사(歎世詞)」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호(元昊)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예종실록』 1년 4월 24일, 『예종실록』 1년 4월 27일, 『영조실록』 12년 6월 1일, 『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숙종실록』 25년 2월 10일, 『숙종실록』 29년 11월 16일, 『정조실록』 6년 4월 19일 |
총론
[?~?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는 관란(觀瀾) 또는 무항(霧巷)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원주(原州)이다. 아버지는 별장(別將)을 지낸 원헌(元憲)이고, 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고려 때 국자진사(國子進士)를 지낸 원천상(元天常)의 딸이자, 두문동 72현에 속하는 원천석(元天錫)의 조카이다. 할아버지는 원중랑(元仲浪)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종부시(宗簿寺) 령(令)을 지낸 원광명(元廣明)이다.
세종~예종 시대 활동
1423년(세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문종(文宗) 때 성균관(成均館) 직제학에 이르렀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4번째기사],[『명곡집(明谷集)』 권23 「집현전직제학원공묘갈명(集賢殿直提學元公墓碣銘)」 이하 「원호묘갈명」으로 약칭] 원호는 문학을 잘한다는 명성이 커서 당시 여러 사람들로부터 추대와 존중을 받았다.[「원호묘갈명」]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원호묘갈명」],[『국조보감(國朝寶鑑)』 권9 「단종조」],[『국조보감』 권51 「숙종조」]
1457년(세조 3) 단종(端宗)이 영월에 유배되자, 원호는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고 하였다.[「원호묘갈명」] 단종이 승하한 후 그는 단종의 삼년상을 치렀으며, 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로 돌아와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성호전집(星湖全集)』 권55 「제발(題跋)」],[『추강집(秋江集)』 권8 「부록(附錄)」] 당시 예조 판서였던 조카 원효연(元孝然)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밖에 와서 보기를 청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또한 세조가 그를 호조 참의(參議)에 제수하여 불렀을 때에도 응하지 않았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단종조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원호묘갈명」]
한편 1469년(예종 1) 원호의 차남 원효렴(元孝廉)의 아들인 손자 원숙강(元叔康)이 사관(史官)으로서 대신의 잘못을 썼다가 보복이 일어날까봐 두려워서 사초를 고친 일로 화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예종실록』 1년 4월 24일),(『예종실록』 1년 4월 27일) 이 일로 원호는평소의 저술 및 소장(疏章)을 모조리 불태우고, 자손들에게 다시는 책을 읽어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래서 옛집에는 글이 전혀 남아있지 않고, 연대 또한 오래되어서 관력(官歷)과 생년, 사행(事行)의 시종(始終)이 전하지 않는다.[「원호묘갈명」],[『연려실기술』 권4, 「단종조고사본말」]
이후 1813년(순조 13)에 후손 원석조(元錫祚)가 원호의 흩어진 사록(司祿)과 여러 현인들의 선술(撰述)을 모아 1권으로 엮고, 한치응(韓致應)의 서(序)를 받아 족보의 부편(附篇)으로 간행하였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1926년 후손 원지상(元持常) 등이 흩어진 유고 및 저자와 관련된 실기(實記) 등을 다시 합하여 족보 뒤에 붙이고 이것을 『관란유고(觀瀾遺稿)』라고 하였다.[『관란유고(觀瀾遺稿)』「후서(後敍)」]
성품과 일화
원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단종이 승하한 뒤 토실(土室)속에서 삼년상을 치렀으니, 환란에 대처하여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성호전집』 권55 「제발」] 상을 마친 후에는 다시 원주로 돌아가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한 관찰사가 하인들을 떼어놓고 평복차림으로 찾아갔다. 원호가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나와 만나서 대면했다가 관찰사라는 것을 알고는 손을 내두르며 달아나 들어가서 장차 몸을 더럽혀질 것 같이 하였다.[『연려실기술』 권4 「단종조고사본말」] 그는 앉을 때에는 반드시 단종의 묘소인 장릉(莊陵)을 향하여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장릉으로 머리를 두었다.(『영조실록』 12년 6월 1일),(『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112번지에 있으며, 2009년 원주시 향토유적 2009-2호로 지정되었다. 1699년(숙종 25)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원주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숙종실록』 25년 2월 10일) 1703년(숙종 29)에는 외할아버지 원천석의 사당에 합향(合享)되었다.(『숙종실록』 29년 11월 16일) 이어 1782년(정조 6)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과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정조실록』 6년 4월 19일),[「원호묘갈명」],[『연려실기술』 별집 권4, 「사전전고(祀典典枯)」]
부인 영월 신씨(寧越辛氏)는 보승낭장(保勝郎將)신을현(辛乙賢)의 딸로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원효행(元孝行), 차남은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원효렴이며, 삼남은 원효건(元孝乾), 사남은 원효곤(元孝坤)이다. 딸은 오치종(吳致宗)의 처이다.[「원호묘갈명」]
참고문헌
- 『예종실록(睿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관란유고(觀瀾遺稿)』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곡집(明谷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추강집(秋江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