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禮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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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상(喪)과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모후였던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의 복제(服制)를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일어났던 두 차례의 논쟁.

개설

현종 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예송은 자의대비가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의 상에 입을 복제를 두고 일어났던 분쟁이다. 1659년에 일어난 논쟁을 기해예송(己亥禮訟) 또는 제1차 예송이라 하고, 1674년에 일어난 논쟁을 갑인예송(甲寅禮訟) 또는 제2차 예송이라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인조의 차자(次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특수한 종법적 위상에 있었다. 1659년 시작된 제1차 예송에서는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이 대립하였다. 허목(許穆)·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 등이 주창한 남인의 삼년설은 종통론적으로 효종을 인조의 장자로 보는 것이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한 서인의 기년설은 효종을 차자로 보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당시에 발달했던 조선 예학(禮學)의 두 경향으로 말미암은 학문적 시각 차이가 작용하고 있었다. 효종을 장자로 보는 쪽은 제왕가례(帝王家禮)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왕실에서는 형제의 차서(次序)보다 왕위의 계승자에게 적통을 주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반면 효종을 차자로 보는 쪽은 예의 보편적 원리를 강조하여 왕실과 사서인(士庶人)의 예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지만 차자의 신분에 변동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쪽의 주장에는 『의례(儀禮)』의 복잡한 주소(註疏)들이 전거로 제시되었지만, 그 전거들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단안이 나올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논쟁은 끝없이 지속되었다. 예송은 처음 학문적 논쟁으로 진행되었으나, 여기에 내포된 효종의 정통성이라는 금기 사항이 촉발되면서 위험한 정치적 분쟁으로 비약되었다. 윤선도에 의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공격을 받은 서인들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그들을 비롯하여 남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다.

제2차 예송은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의 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사건으로, 그 논쟁의 구조나 원리는 제1차 예송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제2차 예송은 제1차 예송과 같이 서인 대 남인의 쟁송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제2차 예송은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주된 논쟁은 그해 7월에 현종과 서인 조신(朝臣)들 사이에서 있었다. 현종은 서인들을 설득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독단으로 복제를 개정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수흥(金壽興)과 예관(禮官)들을 처벌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때 왕의 측근에서 복제 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승지(承旨) 김석주(金錫冑)였다. 이리하여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일파의 서인 주류가 몰락하고 청풍김씨와 남인의 연립정권이 대두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에 걸쳐 다져졌던 서인 정권의 지각을 붕괴시키고 정국의 구도를 재편한 초유의 정변이었다.

내용 및 특징

현종대에 예송이 일어나게 된 근원적 요인은 1645년(인조 23) 4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세상을 뜬 후 그해 윤6월 어전회의에서 원손(元孫)으로 칭해졌던 소현세자의 적장자를 버리고 훗날 효종이 되는 아우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후계자로 책봉하여 대통을 계승케 한 것이었다. 당시의 이러한 결정은 종법(宗法)의 원리에 어긋난 것으로 인식되어 대부분의 조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왕의 독단과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은 소현세자의 죽음에 따른 자연적인 계승권의 승계가 아니었고, 기왕에 수립되어 있었던 계승 서열이 인조의 독단에 의해 교체된 비상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제1차 예송의 직접적 계기는 왕의 상(喪)에 모후의 복제를 규정하지 않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미비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참조했던 고전 예서인 『의례』와 당시의 법전이었던 『대명률(大明律)』 및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각기 삼년(三年)과 기년(朞年)으로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다. 논쟁은 주로 『의례』「상복」 참최장(斬衰章)의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지만, 여기에는 근원적 인식 차이가 내재해 있었다.

그것은 예의 적용에 제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집약된다. 이는 신분 문제에 대해 예제가 가진 양면성, 즉 그 차별성과 보편성에 대한 이해 태도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의 분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면 제왕가는 사서인과 달라 왕위 계승자에게 종통을 주게 되므로 효종이 장자의 지위에 있고, 그에 대한 모후의 복을 자최(齊衰) 삼년으로 단정하게 된다.

그러나 예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효종이 왕위에 올랐더라도 천생의 차례인 차자 지위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에 대한 복제도 기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대체로 허목·윤휴 등 남인 학자들이 삼년설을 주장하였고, 송시열·송준길 등 서인 학자들은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남인 중에서도 허적 같은 인물은 당초 기년설을 찬성하였고, 서인 중에서도 원두표(元斗杓)나 김좌명(金佐明) 등은 삼년설을 지지하였다.

변천

1659년의 복제 논쟁은 효종의 국상 후 성복일(成服日) 직전에 송시열과 윤휴 사이에 시작되었다. 국상의 복제는 『국조오례의』「흉례」 복제조에 규정되어 있으나 공교롭게도 여기에 모후가 사왕(嗣王)을 위해 입는 복제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예관들 사이에 논의가 일어나자 당시 궁중에서 상사(喪事)를 지휘하고 있던 송시열이 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휴·박세채(朴世采) 등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이에 윤휴가 첫째 장자를 위해서는 상·하 구분 없이 삼년복을 입으며, 둘째 왕을 위해서는 내외종(內外宗) 즉 동성·이성의 여자 친척이 다 참최를 입는다는 설을 제시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소(疏)에 비록 승중(承重)했으나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예외 규정인 사종설(四種說)을 들어 기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논변은 시한이 촉박하여 중지되었다. 한편 윤휴의 삼년설을 들은 영의정정태화(鄭太和)는 이 문제를 송시열과 의논했으나 사종설에 결부된 종통 문제의 심각성을 예감하고 『의례』에 근거한 삼년·기년설을 다 버리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 없이 모두 기년을 입게 한 규정인 이른바 ‘국제기년복(國制朞年服)’을 건의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본격적인 예송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는 이듬해인 1660년(현종 1) 3월 효종의 연제(練祭)를 앞두고 허목이 복제의 개정을 상소하면서부터였다. 여기서 허목은 『의례』 참최장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 입는 복[父爲長子]’의 가공언(賈公彦) 소설(疏說)인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 장자를 후사로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란 구절을 근거로 하여 효종을 인조의 장자로 단정하고, 자최삼년장의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 입는 복[母爲長子]’에 의해 자의대비의 복을 자최삼년으로 주장하였던 것이다(『현종실록』 1년 3월 16일)(『현종실록』 1년 4월 10일).

이에 대해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비록 승중했으나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사종설에 해당하는 것이라며 삼년설을 비판하고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허목의 상소로 야기된 예송은 서인들의 반박으로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신들의 의견을 받는 한편, 사관을 적상산사고에 보내 『조선왕조실록』에서 전례를 고출해 오게 하였다. 정태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국제기년복을 근거로 기년을 고집했으나, 우의정(右議政) 원두표는 허목의 삼년설을 지지하였다.

이 무렵 조야는 상당히 삼년설에 기울어진 분위기였고 현종도 내심 기년설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송시열과 송준길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윤선도의 상소가 올라와 예송의 진행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윤선도는 송시열 등의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폄훼하고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가르는 것[卑主貳宗]이라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바로 복제에 결부된 금기사항을 발로한 것이었다. 윤선도의 상소로 조정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그는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삼수(三水)에 유배되고 남인들은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제1차 예송은 기년설로 확정되었고, 이를 주장했던 남인들은 차츰 정계에서 추방되었다.

1674년 제2차 예송은 그 자체의 예학적 논리와 현종 말~숙종 초의 정치적 상황이라는 두 요인으로 인해 일어났다. 예학적 논쟁의 요인은 바로 제1차 예송에서 국제기년복을 채택함으로써 귀결되지 못하고 남겨졌던 효종의 종법적 위상 문제, 즉 효종이 인조의 장자인가 중자인가 하는 종통론적 문제이었다. 『경국대전』은 아들에 대해 장자·중자의 구별을 두지 않았지만 자부(子婦)에 대해서는 장자부 기년, 중자부 대공(大功)으로 분별해 놓고 있었으므로 인선왕후의 장자부·중자부 지위 즉 효종이 장자인가 차자인가 하는 종통론적 지위를 판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의 본질과 논리는 제1차 예송 때와 같은 것이었지만, 논쟁의 주체는 서인 중심의 신료 집단과 현종·김석주 중심의 왕실 세력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송시열 일파와 청풍김씨 일파의 대리전과 같은 성격도 띠고 있었다. 문제를 촉발시킨 인물은 영남 유생 도신징이었지만, 남인들은 복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별로 가담하지 못하였고 또 복제가 번복 개정된 후에도 수개월간 서인들을 비판하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2차 예송은 단순히 제1차 예송을 반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송에서 패퇴한 서인들이 점차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 빈자리에 남인들이 보충됨으로써 숙종 초에 정국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의의

제1차 예송은 당초 윤휴가 기년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다음 해 허목이 이를 재론하여 송준길·송시열과 논변을 반복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예학의 학술 논쟁적 성격이 짙었다. 예송은 17세기에 이르러 급속하게 발달한 조선 예학의 서로 다른 학문적 견해 차이에서 야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왕실 예법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차별주의 예학의 전통과, 그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가례(家禮)』 중심의 보편주의 예학의 학문적 성향 차이가 왕실의 종통에 대한 인식 차이를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정치 문제화한 이유는 복제에 결부되어 있었던 종통 문제의 발로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윤선도의 상소에 의해 폭로됨으로써 문제가 크게 증폭되었다. 윤선도에 의한 복제 예론의 정치 무기화는 서인들을 크게 자극하여 예송에 관련된 남인들의 축출을 야기하였다.

제2차 예송의 주제와 논리는 본질적으로 제1차 예송 때와 같았지만, 그 논쟁의 담당자들은 다른 사람들이었으며 또한 서인과 남인의 대결로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현종 대에 있었던 두 차례의 예송으로 인해 이후 조정은 서로 군자와 소인으로 지목하여 타파하려는 흑백 논리가 팽배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서로 견제 비판하며 공존을 인정하던 풍토는 사라지고, 결국 제2차 예송 이후 수차례의 환국(換局)을 거쳐 일당 전제의 추세로 나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예송은 조선후기의 정치 환경을 변화시킨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송을 두고 전개된 정치 형태는 현상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문치주의를 이념적 바탕으로 했던 조선시대 사대부 정치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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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례주소(儀禮註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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