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변갑(魚變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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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1년(우왕 7)~1435년(세종 17) = 55세]. 조선 초기 정종(定宗)~세종(世宗) 때의 문신. 경연청(經筵廳) 검토관(檢討官)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자는 자선(子先)이고, 호는 면곡(綿谷)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거주지는 함안(咸安)과 서울이다. 아버지는 대구현령(大邱縣令)을 지낸 어연(魚淵)이고, 어머니 함안 이씨(咸安李氏)는 무진부사(茂珍府使)이운길(李云吉)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전객시(典客寺)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어백유(魚伯遊)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삼사(三司) 좌윤(左尹)을 지낸 어득룡(魚得龍)이다.

정종~세종 시대 활동

1399년(정종 1)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408년(태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태종실록(太宗實錄)』 8년 3월 12일),[『방목(榜目)』] 이후 교서관(校書館)부교리(副校理)를 시작으로 성균관(成均館)주부(主簿)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 등을 역임하였다.(『태종실록』 9년 3월 4일),[『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어변갑행장(魚變甲行狀)」] 그러다가 1410년(태종 10) 8월 어변갑(魚變甲)은 태종의 부마인 이저(李佇)가 군사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며 그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태종이 요구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대죄(待罪)에 처해졌다.(『태종실록』 10년 8월 19일),(『태종실록』 10년 8월 19일) 이후 태종의 반대로 어변갑은 대간(臺諫)의 업무를 보지 못하다가, 그해 9월이 되어서야 다시 대간으로 등용될 수 있었다.(『태종실록』 10년 9월 12일)

이후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어변갑은 『정종실록(定宗實錄)』의 편수에 참여하였고, 이어 1420년(세종 2) 세종이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자 집현전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가 1422년(세종 4)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2년 3월 16일),[『국조인물고』「어변갑행장」] 그리고 1423년(세종 5)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비교하여 볼 때 『고려사(高麗史)』가 너무 소략하므로 국가의 일을 자세히 기재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세종의 판단에 따라 어변갑은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춘추(春秋)를 겸직하게 하였다.(『세종실록』 5년 6월 24일) 이후 어변갑은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에 참여하는 등 집현전 직제학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가다가 1432년(세종 14) 5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였다. 이에 세종이 그를 사간원 지사(知事)로 임명하였으나, 어변갑은 이마저도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세종실록』 6년 1월 25일),(『세종실록』 14년 5월 17일),[『국조인물고』「어변갑행장」]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435년(세종 17)에 어머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국조인물고』「어변갑행장」]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5년 만인 1510년(중종 5)에 윤금손(尹金孫)이 외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시문집 『함종세고(咸從世稿)』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어변갑과, 어효첨(魚孝瞻), 어세겸(魚世謙) 3대의 시문이 실려 있다.[『삼탄집(三灘集)』「삼탄집발(三灘集跋)」]

성품과 일화

어변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종이 그의 효행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벼슬을 주었으나,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세종실록』 14년 5월 17일) 어변갑이 사퇴하고 귀향하여서는 부모 모두 살아 계시고 여러 아우들도 무고(無故)하였다. 조석으로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날마다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으며, 재산 다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래 된 재산 증식을 위한 식화 계권(殖貨契券)도 모두 불사르고 조금도 관가에 간섭하는 일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세(淸世)의 한 한인(閑人)이었다.[『국조인물고』「어변갑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남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 35번지에 있다. 1995년 아버지 어연 및 어머니 함안 이씨의 묘소와 함께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고성의 면곡서원(綿谷書院)에 제향되기도 하였다.

어변갑의 부인은 창녕 성씨(昌寧成氏)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성사제(成思齊)의 딸로 1남을 두었는데, 바로 어효첨이다. 어효첨은 1429년(세종 11) 과거에 급제한 이후 이조 판서(判書)와 중추부 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어세겸과 어세공(魚世恭)은 각각 좌의정과 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6년 1월 3일),(『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6년 11월 28일),(『성종실록』 17년 7월 15일) 또한 6대손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 어유귀(魚有龜)의 딸이 경종(景宗)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참고문헌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방목(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삼탄집(三灘集)』
  • 『함종세고(咸從世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