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숙(梁山璹)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61(명종 16)∼1593(선조 26) = 33세]. 조선 중기의 의병장.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자는 회원(會元)이고, 호는 반계(蟠溪)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거주지는 전라도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양응정(梁應鼎)이고, 어머니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판관(判官)박중윤(朴仲允)의 딸이다.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양팽손(梁彭孫)의 손자이고, 예조 참의(參議)양응태(梁應台)의 조카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의 활동

양산숙(梁山璹)은 일찍이 시사(時事)가 평탄하지 못한 것을 보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나가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26년 6월 1일] 그런데 29세가 되던 1589년(선조 22) 조헌(趙憲)이 지부상소(持斧上疏 :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吉州)에 유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2년 5월 5일] 그리고 이어 그해에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양산숙이 상소를 올려 조헌의 원통함을 변호하면서 그가 정여립(鄭汝立)의 반역을 예언하였다며, 이는 선견(先見)의 충언(忠言)이었음을 아뢰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아울러 얼마 후 양산숙은 서인(西人)인 조헌과 함께 정철(鄭澈)을 칭찬하고, 동인(東人)인 이산해(李山海) 등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2월 1일, 『우계집(牛溪集)』 우계연보보유(牛溪年譜補遺) 권2 「잡록(雜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형인 양산룡(梁山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檄文)을 돌려 향병(鄕兵)을 모았다. 그 뒤 김천일(金千鎰)을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아 적의 예봉에 맞서 싸우며 강화(江華)로 들어가 진을 쳤다. 양산숙은 장사 10여 인을 모아 김천일의 밀서를 가지고 강화에서부터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만 움직이면서 의주(義州)에 있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였다. 당시 적병이 중외(中外)에 가득하여 도로가 막혀 행재소에서의 명령이 남쪽 지방으로 전달되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양산숙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서는 크게 기뻐하여 즉시 불러들였다. 양산숙이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전라도의 소식과 의병을 일으킨 일 등을 아뢰니, 선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즉시 양산숙에게 벼슬을 내려 공조 좌랑(佐郞)으로 삼고, 교지를 주어 군중(軍中)으로 돌아가 알리도록 하였다[『선조실록』선조 25년 7월 20일, 선조 25년 7월 24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8월 1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3년 3월 10일].

이후 양산숙은 다시 김천일을 따라 진주(晉州)에 이르러 김천일의 서신을 가지고 명(明)나라 장수 유정(劉綎)에게 가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의 사기(辭氣)가 강개하여 유정도 탄복하였으나 여전히 군사를 출동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양산숙이 진주성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적이 이미 성을 핍박하고 있었는데, 이때 동행한 몇 사람은 모두 탈주하였으나, 그는 홀로 남강(南江)을 통해 성에 들어갔다.[『선조수정실록』선조 26년 6월 1일] 그리고 얼마 후인 1593년(선조 26)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을 부축하여 북쪽을 향해 재배(再拜)를 올린 후 병사(兵使)최경회(崔慶會), 복수장(復讎將)고종후(高從厚)와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향년 33세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26년 6월 1일, 『승정원일기』인조 13년 3월 10일]

성품과 일화

양산숙은 태도가 단정하고, 총명하였다. 배움을 좋아하여 오로지 경전(經典)에만 전심하였고, 천문, 지리에 방통(傍通)했으며, 병학(兵學)도 연구하였다.[『이계집』 권26 「공조좌랑양공신도비」] 과거 공부에 대한 뜻을 끊고 나주의 남쪽 삼향리(三鄕里)에 터를 골라 살았는데, 본가(本家)와는 1백여 리가 되었다. 하지만 매번 어버이를 뵈러 반드시 걸어갔다.[『은봉전서(隱峰全書)』 권8 「기사(記事)」]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가 온통 침탈을 당하여 선조가 서로(西路)로 파천하고, 부귀한 자들은 모두 제 몸만 피하는 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양산숙와 양산룡 형제는 통곡하여 분발하여 어머니 박씨에게 가서 “나라가 이같이 위태로우니 저희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박씨는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 온 것이 다른 집안에 비할 바가 아니니 무슨 수고로울 것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3년 3월 10일] 이에 양산숙 형제는 의병을 모아 왜적에게 맞섰다.

1593년(선조 26) 왜적이 영남(嶺南)에 진을 치자 김천일은 여러 군대와 협력하여 퇴로를 공격하면서 진주를 지키고 있었다. 양산숙은 병으로 뒤처져 있다가 행보를 빨리하여 진주로 갔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적이 반드시 그 성을 얻으려고 하여 성이 매우 위험한데, 어찌 그리 급하게 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지만, 양산숙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들어가 함께 지키니 방어 태세가 빈틈이 없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에 김천일이 양산숙에게 성에서 나갈 것을 권하였는데, 양산숙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일을 함께한 이상 마땅히 함께 죽어야 합니다.” 하고, 끝까지 떠나지 않아 마침내 살신성인의 절개를 세웠다.[『승정원일기』인조 13년 3월 10일]

묘소와 후손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의관(衣冠)을 전라도 나주(羅州) 북쪽 양응정(梁應鼎)의 묘 밑에 묻었다. 그리고 1631년(인조 9)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이계집(耳溪集)』 권26 「공조좌랑양공신도비(工曹佐郞梁公神道碑)」] 김천일의 제사를 모신 나주 정렬사(旌烈祠)에 위패를 모셨으며, 진주 촉석성(矗石城 : 진주성) 안에 있는 창렬사(彰烈祠)에도 위패를 모셨다.[『여지도서(輿地圖書)』] 이어 1819년(순조 19)에는 가증(加贈)하고 ‘충민’이란 시호를 내렸다.[『순조실록(純祖實錄)』순조 19년 5월 25일, 『오재집(梧齋集)』 부록(附錄) 권2]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이계집』 권26 「공조좌랑양공신도비」]

부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의정(李義貞)의 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생하자 양산숙의 어머니인 박씨와 양산룡, 시동생인 양산축(梁山軸) 등을 비롯하여 그 가족 등 일가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무안 삼향포(三鄕浦)에서 왜적을 만나게 되었고, 이에 양산숙의 어머니인 박씨를 필두로 양산룡과 양산축, 양산축의 누이, 양산룡의 부인 등이 물에 빠져 순절하였다. 이때 양산숙의 부인인 광산 이씨는 여종들이 건져내었는데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언덕에 숨어 있다가 왜적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칼로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26년 6월 1일, 『승정원일기』인조 13년 3월 10일] 이후 이러한 순절을 인정하여 인조(仁祖)는 광산 이씨를 숙부인(淑夫人)에 추증하고, 그녀가 살던 마을에 이를 표창하는 정문(旌門)을 세웠다.[『여지도서』]

참고문헌

  • 『선조실록(中宗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순조실록(仁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은봉전서(隱峰全書)』
  • 『이계집(耳溪集)』
  • 『우계집(牛溪集)』
  • 『기재사초(寄齋史草)』
  • 『백사집(白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