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도(安奇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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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도 지방의 안동·의성·청송·진보·영해 등지에 설치된 역을 관할한 역도(驛道).

개설

안기도(安奇道)는 고려시대 상주도(尙州道)의 속역인 안기역(安基驛) 등과 경주도(慶州道)의 속역인 병곡역(柄谷驛) 등을 계승하여 조선 세종 연간에 재편되었다.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조선전기에는 역승(驛丞)이, 후기에는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장하였다. 안기도는 안동을 중심으로 의성-의흥-신령 방면, 안동-청송-흥해 방면, 안동-진보-영해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내용 및 특징

안기도는 고려시대 상주도의 속역인 의성의 청로역(靑路驛)·철파역(鐵波驛), 안동의 옹천역(甕泉驛)·안기역·안교역(安郊驛), 임하의 금조역(琴曹驛)·통산역(通山驛), 의흥의 우곡역(牛谷驛), 안덕의 문거역(文居驛)·화목역(和目驛) 등과 경주도에 소속된 예주의 병곡역·적용역(赤冗驛), 영덕의 주현역(酒垷驛)·남역(南驛) 등을 계승하여 조선 세종대에 성립하였다. 그 뒤 1457년(세조 3)에는 이조의 건의에 따라 창락도(昌樂道)를 안기도에 통합하였다. 이어 1460년(세조 6)에는 안기도의 속역인 영해부의 영양역(寧陽驛)·병곡역, 영덕현(盈德縣)의 주등역(酒登驛)·남역을 송라도(松羅道)에 이속하고, 그 대신 창락도에 속한 7개 역과 안기도에 소속된 12개 역을 통합하여 안기도라고 하였다.

성종 연간인 1471년(성종 2)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송라도에 속한 영양역·각산역(角山驛)·청운역(靑雲驛)·문거역·화목역 등을 다시 안기도에 소속시키고, 안기도에 속한 옹천역·선안역(宣安驛)은 창락도로 이속하였다(『성종실록』 2년 윤9월 1일). 그 결과 안기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안기역·철파역(鐵破驛)·청로역·운산역(雲山驛)·금소역(琴召驛)·송제역(松蹄驛)·청운역·문거역·화목역(和睦驛)·각산역·영양역 등 11개 속역을 관할하는 역도로 확립되었다.

안기도의 구체적인 운영 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을 바탕으로 역속과 역마의 배속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 <표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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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에서 볼 수 있듯이, 안기도에는 역리(驛吏) 4,096명, 역노(驛奴) 785명, 역비(驛婢) 417명과 역마 189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특히 안기역의 경우에는 무려 1,019명에 이르는 역리와 196명의 역노, 111명의 역비가 소속되어 있었다. 『안기도역지(安奇道驛誌)』에 따르면 안기도에는 그밖에도 일수(日守)가 배속되어 있었으며, 『고종실록』에는 1873년(고종 10)에 별포수(別砲手) 등 포군(砲軍) 16명을 배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종실록』 10년 7월 1일).

또한 안기도의 중심 역인 안기역에는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건립한 근무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안기도역지(安奇道驛誌)』에 따르면, 동헌(東軒) 8칸, 통인방(通引房) 1칸, 낭청방(郎廳房) 2칸, 공수청(公須廳) 3칸, 남행랑(南行廊) 6칸, 마구(馬廐) 3칸, 외삼문(外三門) 3칸과 인리청(人吏廳), 관청고(官廳庫) 등이 있었으며, 아사(衙舍)로서 소양관(蘇襄舘)이 건립되어 있었다.

한편 안기역이 위치한 안동은 고려시대 말기에 홍건적을 피해 공민왕이 임시로 피난한 곳으로 유명하다. 공민왕이 머물렀던 영호루에는 왕이 친필이 새겨져 있으며, 왕의 초상을 봉안한 전각도 있다. 또 소양관 동남쪽 숲에는 ‘은배수(銀盃籔)’라 하여 공민왕이 은잔을 매립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그밖에 국왕신당(國王神堂), 소백당(小白堂), 조산(造山), 괴목총사(槐木叢祠), 성황당 등의 신당이 건립되어 있었다.

변천

안기도는 고려시대의 상주도와 경주도의 일부 속역이 조선시대에 재편되면서 성립하였다. 그 과정에서 역명의 개칭과 역도 개편에 따른 속역의 이설이 있었다. <표2 참조> 안동의 안기역(安基驛)은 안기역(安奇驛)으로, 임하의 금조역(琴曹驛)은 금소역(琴召驛)으로, 평해의 주현역은 주등역(酒登驛)으로, 통산역(通山驛)은 일직신역(一直新驛)으로 개칭되었다가 운산역(雲山驛)으로 바뀌었다. 또 안동 감천고현(甘泉古縣)의 유동역(幽洞驛), 영해의 영양역(寧陽驛), 예안의 용안역(用安驛) 또는 선안역(宣安驛)이 새로 설치되었다. 그 뒤 세종 때 일시적으로 신설된 안동의 일직신역(一直新驛)과 예안의 예안신역(禮安新驛), 진보의 진보신역(眞寶新驛)이 폐지되고, 일직신역에는 운산역이, 진보신역에는 각산역이 각각 신설되었다. 1691년(숙종 19)에는 청송의 이전평역(梨田坪驛)이 신설되었다.

역도의 재편에 따라 속역의 이속도 잦았다. 1457년에는 창락도를 안기도에 통합하였으며, 1460년에는 안기도 속역인 영해의 영양역(寧陽驛)·병곡역(柄谷驛), 영덕의 주등역(酒登驛)·남역(南驛)을 송라도에 이속(移屬)하는 반면에 창락도의 소관인 7개 역과 안기도의 소관인 12역을 통합하여 안기도(安奇道)라고 하였다. 그러나 1471년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송라도(松羅道)에 속한 영양역(寧陽驛)·각산역(角山驛)·청운역(靑雲驛)·문거역(文居驛)·화목역(和目驛) 등을 다시 안기도(安奇道)에 이설하고 안기도에 속한 옹천역(甕泉驛)·선안역(宣安驛)창락도(昌樂道)에 이설하였다.

그 결과 성종대의 『경국대전』 체제에 이르러 안기도는 안기(安奇: 안동), 철파(鐵破: 의성), 청로(靑路: 의성), 운산(雲山: 안동), 금소(琴召: 안동), 송제(松蹄: 안동), 청운(靑雲: 청송), 문거(文居: 청송), 화목(和睦: 청송), 각산(角山: 진보), 영양(寧陽: 영해) 등 11개 속역을 관할하는 역도로 확립되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에는 안기도의 속역으로 안동의 경우 안기역·옹천역·일직신역·금소역·송제역 등이 열거되어 있으나, 같은 책 안동대도호부 역원 조에는 안동도호부 소속의 속역으로 안동의 안기역·옹천역, 임하의 금소역·송제역, 풍산의 안교역, 일직의 일직신역, 감천의 유동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안교역과 유동역이 추가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안동의 일직신역은 원래 세종대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등장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동대도호부 역원 조에는 일직신역이 없고 대신 "운산역은 일직현(一直縣)에 있다."는 기록만 나타난다. 이로 볼 때 일직신역이 운산역으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기도는 이처럼 속역의 신설과 치폐 및 이속을 거듭하다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안기도역지』에는 안동의 안기역·운산역·송제역·금소역, 의성의 청로역·철파역, 영해의 영양역, 청송의 문거역·화목역·청운역·이전평역, 진보의 각산역 등 12개 역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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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영남읍지(嶺南邑誌)』
  • 『안기도역지(安奇道驛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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