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沈憬)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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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심경 |
한글표제 | 심경 |
한자표제 | 沈憬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광해군 |
집필자 | 장준호 |
자 | 중오(仲悟)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6년(명종 11) |
사망 | 1616년(광해군 8) |
본관 | 청송(靑松)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심연원(沈連源) |
조부 | 심강(沈鋼) |
부 | 심지겸(沈智謙) |
모_외조 | 함안 이씨(咸安李氏) : 이제(李霽)의 딸 |
처_장인 | 금성 박씨(錦城朴氏) : 박세광(朴世光)의 딸 →(자녀)4남 |
자녀 | (1자)심정인(沈廷寅) (2자)심정량(沈廷亮) (3자)심정홍(沈廷弘) (4자)심정희(沈廷凞)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심경(沈憬) |
총론
[1556년(명종 11)~1616년(광해군 8) = 61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동몽교관(童蒙敎官)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중오(仲悟)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정랑(正郞)에 추증된 심지겸(沈智謙)이고, 어머니 함안 이씨(咸安李氏)는 경력(經歷)이제(李霽)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심강(沈鋼)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沈連源)이다.
선조~광해군 때의 활동
심경(沈憬)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그 과정이 좋지 않았다. 심경이 태어난 후 아버지 심지겸이 어머니를 멀리하자 부유하던 어머니의 친정에서 창비(倡婢)를 보내 주었는데 이것이 추잡스러운 소문으로 번지면서 조정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심씨 가문에서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심지겸의 누이이자 대비(大妃)이던 인순왕후(仁順王后)에게 이를 알리자, 중사(中使)와 나인(內人)들을 보내 심경의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심경은 심씨 가문에서 양육하였는데, 10세쯤 되었을 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알고서는 심씨 집안과의 인연을 끊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18년 8월 1일] 그러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성리학의 여러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다가, 율곡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심경과 교유하던 이발(李潑) 형제가 연루되어 죽었으나, 모반 사건이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다. 이에 심경이 나서서 그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치러주었다가 이 일이 문제가 되어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염헌집(恬軒集)』 권31 「동몽교관심공묘비명(童蒙敎官沈公墓碑銘)」 이하 「심경묘비명」으로 약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면천(沔川)으로 돌아왔다. 이후 오직 경사(經史)에만 몰두하다가, 1615년(광해군 7) 동몽교관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출사(出仕)하였다.[「심경묘비명」, 『동춘당집(同春堂集)』 별집 권7 「연보(年譜)」] 이후 대북파(大北派)는 정인홍(鄭仁弘)을 내세워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심경이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한찬남(韓纘男)에게 인목대비의 폐출에 대한 음모를 폭로하고, 그 부당함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한찬남이 심경의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밝히기 위해 그를 몇 달 동안 옥에 가두었고, 심경은 이경원(李敬元), 이극해(李克諧) 등과 함께 수금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7년 윤8월 29일, 「심경묘비명」, 『동춘당집』 별집 권7 「연보」] 그 후 심경은 경성(鏡城)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년 만인 1616년(광해군 8)에 향년 61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11월 10일, 「심경묘비명」]
성품과 일화
심경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이이는 그를 유생으로서 경학이 정밀하다고 하여 칭찬하였다. 이후 이이는 다른 사람들과의 논의를 거쳐 백의(白衣)로 경연(經筵)에 나가도록 천거하기도 하였다. 또한 평생 『근사록(近思錄)』을 가까이 하며, 스스로를 경계하고 그 뜻을 풀어 주해를 달아 전하였다.[「심경묘비명」]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된 이발 형제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치러주고, 인목대비의 폐비 논의도 폭로하는 등 이러한 심경의 결단에 대하여 죽음에 이를지라도 두려워하지 하거나 안색을 바꾸지 않은 채 한 세상에 우뚝 섰으니, 가히 목숨을 걸고 도(道)를 옳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신의로써 벗을 삼았으며, 인후하고 공손 근신하여 정도를 지켜 아첨하지 않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심경묘비명」]
묘소와 후손
심경의 묘소는 원래 고양(高揚)에 있었으나, 이후 청송백(靑松佰)심덕부(沈德符)의 묘 곁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다가 70여 년이 지난 후 문중 내에서 심경의 묘소가 선조의 묘소와 너무 가까우므로, 이장(移葬)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이에 심경의 묘를 다시 고양의 옛 자리로 옮겼다. 임상원(任相元)이 지은 묘비명(墓碑銘)이 전한다.
부인 금성 박씨(錦城朴氏)는 충의위(忠義衛)박세광(朴世光)의 딸로, 자녀는 4남을 두었다. 장남인 심정인(沈廷寅)은 진사(進士)로 인의(引儀)를 역임하였고, 차남인 심정량(沈廷亮)은 요절하였다. 3남인 심정홍(沈廷弘)도 진사(進士)로 찰방(察訪)을 지냈고, 4남은 심정희(沈廷凞)는 학생(學生)이다.
참고문헌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춘당집(同春堂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염헌집(恬軒集)』
- 『우복집(愚伏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