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成浩)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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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성호 |
한글표제 | 성호 |
한자표제 | 成浩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사집(士集) |
호 | 성암(省庵)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45년(인종1) |
사망 | 1588년(선조21) |
본관 | 창녕(昌寧)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인천(仁川) 신현리(新峴里) 의 언덕 |
증조부 | 성완(成玩) |
조부 | 성희주(成希周) |
부 | 성세강(成世康) |
모_외조 | 강릉최씨(江陵崔氏): 최흥종(崔興宗)의 딸 |
처_장인 | 전씨(田氏): 전응진(田應震)의 딸 →(자녀)2남 1녀 |
자녀 | (1자)성여권(成汝權) (2자)성여기(成汝機) (1녀)이모(李某)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성호(成浩) |
총론
[1545년(인종1)∼1588년(선조21) = 44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사집(士集), 호는 성암(省庵)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내자시(內資寺)직장(直長)성세강(成世康)이고, 어머니 강릉최씨(江陵崔氏)는 현감(縣監)최흥종(崔興宗)의 딸이다. 감사성세평(成世平)의 조카이고, 이조 판서성영(成泳)의 4촌이다.
선조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소학(小學)』을 배우고 나서, 일상의 행동은 모두 『소학』의 가르침대로 따랐다. 나이 20세가 못되어 정재(靜齋)남언경(南彦經)과 척암(惕庵)김근공(金謹恭)의 문하에 나아가서 수학하였다. 과거를 위한 공부를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만 열중하여, 성리학의 이론에 정통하였다. 일찍이 산방(山房)에서 독서하다가 과로로 병이 생겼는데, 기질이 본래 연약하여 병이 점점 깊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안정을 취하고 몸을 조리하여 7년 만에 병석에서 일어나니, 사람들이 그의 학력(學力) 때문이라고 하였다. 병을 앓을 때에도 잠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8년(선조11)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강릉(康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때 한강(寒岡)정구(鄭逑)와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 등 전국에서 9명이 그와 함께 천거되었다. 1580년(선조13) 연은전(延恩殿)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창릉(昌陵) 참봉으로 옮겼다. 선조는 전국에서 학식과 행실이 뛰어난 소장 학자들을 추천 받아 그들을 광해군(光海君)의 사부(師父)로 임명하였는데, 성호는 1583년(선조16)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어 세자 광해군을 가르쳤다. 후일 그가 죽고 난 다음에 임금이 된 광해군은 그의 은공을 잊지 않고 제수(祭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당상관의 관직을 추증하였다.
1586년(선조19) 사섬시(司贍寺)주부(主簿)로 옮겼고, 이어서 진안현감(鎭安縣監)에 임명되어, 병을 앓다가 1588년(선조21) 고을 관아에서 객사하니, 향년이 44세였다. 병이 깊어지자 탄식하였으나 곧 마음 편히 천명을 받아들였다. 그가 죽자, 온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소식(素食)하였고, 발인할 때 사람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곡을 하며 전(奠)을 올렸다.
성리학 이론개발과 실천
정재남언경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영숙(永叔)한수(韓脩)와 ‘청허 일대설(淸虛一大說)’을 논쟁하였는데, 성호는 “청탁(淸濁)은 음양(陰陽)의 기(氣)이고, 허실(虛實)은 그 형(形)이며, 일이(一二)는 그 수(數)이고, 대소(大小)는 그 상(象)이다. 모두 상대(相對)의 형(形)이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이(理)이다. 지금 치우치게 청허(淸虛)만을 강조하여 하나의 큰 도(道)가 된다고 한다면, 기(氣)가 이(理)가 된다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탁(濁) · 실(實) · 이(二) · 소(小)가 오로지 도(道) 밖의 것이란 말인가?” 하였다.
그는 또 「논학설(論學說)」을 지었는데, 여기서 “경(敬)이란 일(一)이니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는 것이고, 의(義)란 의(宜)로서 인욕(人欲)이 모두 정화(淨化)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고, “밤기운이 청명하면 인(仁)과 의(義)의 마음이 마치 중천(中天)에 떠 있는 백일(白日)처럼 상쾌하지만,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 등이 연기가 되어 눈을 가리고, 냄새가 되어 코에 스며들면, 한 순간에 도를 터득할 수 없게 된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성(性)이란 명(命)의 이(理)요, 명이란 성의 수(數)이다. 명은 천(天)에 있고 성은 나에게 있다. 천에 있는 것은 천에 맡기고, 나에게 있는 것은 스스로 다할 뿐이다. 스스로 다한다 함은 무엇인가? 도(道)를 이와 같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와 같은 성호의 주장을 윤증(尹拯)이 종합해서 논하기를 “그 기질은 청명하고 그 의지는 높고 멀며, 그 학문은 허정(虛靜)과 존양(存養)을 근본으로 해서 진절(眞切)과 간이(簡易)를 요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38 「성암 성공 묘갈명(省庵成公墓碣銘)」 참조.)
성호는 공부의 효과에 대해서도 말하였는데, “공부에 진도(進度)가 없다는 것은 그 효과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 효과를 계산하는 것이 바로 조장(助長)시키려는 욕심이다. 그러한 욕심이 있다면, 어찌 배움에 진전이 있겠는가?” 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맑고 깨끗하여 성색(聲色)과 세리(勢利)를 멀리 하였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였다. 조그마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삼가 조심하였고, 얼굴에는 잘난 체 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적을 탐독할 때에는 유학의 경전(經傳)에서부터 선유(先儒)의 저작물에 이르기까지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구두(句讀)나 전주(箋註)의 지엽적인 것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말뜻의 표상(表象)에만 중점을 두었다. 불교와 도교의 경전까지도 모두 환하게 꿰뚫고 있었다.
비문과 후손
묘소는 경기도 인천(仁川) 신현리(新峴里)의 언덕에 있는데, 4촌 동생 성람(成灠)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백여 년 뒤에 명재(明齋)윤증이 행장에 의거하여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전씨(田氏)는 참봉(參奉)전응진(田應震)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성여권(成汝權)은 첨사(僉使)를 지냈다. 후손들은 대개 무관 출신이 많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재유고(明齋遺稿)』
- 『약천집(藥泉集)』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