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람(成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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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6년(명종11)∼1620년(광해군12) = 65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초명이 성협(成浹)이다. 자는 사열(士悅), 호는 청죽(聽竹)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옮겨 산 상주(尙州)이다.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성세평(成世平)이고, 어머니 광주노씨(光州盧氏)는 부사(府使)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호조 좌랑성완(成玩)의 증손자이고, 예조 좌랑성진병(成震丙)의 조부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원래 이름은 성협이었는데, 감옥의 죄수 중에 같은 이름이 있어서 성람(成灠)이라고 고쳤다.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음보로 효릉(孝陵) 참봉(參奉)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성리학에 뜻을 두어 사촌형 성호(成浩)와 함께 동강(東岡)남언경(南彦經)의 문하(門下)에서 동문수학하였다. 그 뒤에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을 찾아가서 사사(事師)하여, 선각(先覺)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성리학의 이론을 터득하여 명성이 높아졌다. 또 의학을 성리학의 이론과 결합하여 의술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어의(御醫) 허준(許浚)에 비견될 만큼 유명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라에서 구언(求言)하였을 때 상소를 올려 나라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때 체소(體素) 이춘영(李春英)이 사관(史官)으로 있다가 그 글을 보고, “당세(當世)의 공변된 논의(論議)로서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또 문사(文辭)도 이처럼 훌륭한데도 과거를 보지 않았으니, 진실로 참된 유자(儒者)이다.” 하고,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여, 서로 깊이 사귀었다. 그의 처가(妻家)가 상주(尙州)에 있었는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가로 피난갔다가 그대로 거기서 살았다. 처가집이 몹시 가난하여 끼니마저 자주 끊겼으나, 그의 마음은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그가 상주에 있을 때 가휴(可畦)조익(趙翊) ·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 · 창석(蒼石)이준(李埈) 등과 가깝게 교유(交遊)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장원서(掌苑署)별좌(別坐)에 임명되고,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를 거쳐, 공조 좌랑으로 승진하였다가 1606년(선조39) 무주 현감(茂朱縣監)으로 나갔다. 1604년(선조37) 선조가 인후증(咽喉症)과 실음증(失音症)을 오랫동안 앓자 약방에서 성협의 의술이 통달하였다고 추천하였다. 선조 만년에 유의(儒醫)로서 활동하면서 약방의 어의들과 함께 임금이 진어(進御)할 약을 제조하였다. 1608년(선조41) 유의로 의관 허준 등과 상의하여 탕제를 지었으나 아무 효험없이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 초기에 약을 잘못 제조하였다고 하여 허준 등이 귀양갈 때 그도 상주로 쫒겨났다. 광해군 시대에 상주에서 은거하여 살다가, 1620년(광해군12) 7월 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65세였다.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

선조가 승하하자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당시 유의였던 성람(기록에는 성협)이 입시하여 이 소문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남계집(南溪集)』과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있다. 1608년(선조41) 1월 약방에서 의관들과 박지지(朴知止) · 성협 등이 상의하고 선조의 허락을 받아 사물원(四物元)에 자신환(滋腎丸)을 합하고 천마(天麻), 방풍(防風), 백지(白芷) 등을 가미(加味)하였다. 선조는 이 약제를 복용하다가 2월에 돌아갔는데, 선조가 승하하자, “약밥에 중독되어 돌아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유의 성람이 입시(入侍)하였다가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도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 하였다. 그런데 두 책에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원두표(元斗杓)가 광해군의 선조 시역(弑逆)을 성토하려다가 근거를 찾지 못해 그만 둔 것과 조익(趙翼)이 통유문(通諭文)에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한 것도 붙여 적으면서, 독살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람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자비롭고 어질며 평탄하고 신실(信實)하였다. 남과 더불어 사귈 때에는 성심(誠心)을 다하고 남을 측은하게 여기며, 조금도 후미진 행실이나 가식적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선유(先儒)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많았으므로, 대체로 그의 견문이 넓고 의론(議論)이 공정하여, 후생(後生)들이 그를 믿고 존경하였다.

그는 학문을 좋아한데다 이이와 성혼 같은 선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유자(儒者)의 규모(規模)와 의리(義理)의 향방(向方)을 가지고 있어서 세속 사람들이 하는 일을 싫어하였다. 또 의술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 정수(精秀)하고 미묘(微妙)한 경지에 이르러, 그 때문에 목숨을 구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때때로 흥을 돋울 만한 일을 만나면 시를 읊었는데, 그 시가 고상하고 기발하여 속된 기운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상주 서쪽 10리 임암(臨巖)의 묘원(墓原)에 있고, 포저(浦渚)조익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진사(進士)홍수민(洪秀民)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 성여송(成汝松)은 사섬시(司贍寺)주부(主簿)를 지내고, 손자 성진병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조천기(朝天記)』
  • 『서애집(西厓集)』
  • 『남계집(南溪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약포집(藥圃集)』
  • 『어우집(於于集)』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