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문(成以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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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6년(명종1)∼1618년(광해군10) = 73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질부(質夫), 호는 은궤옹(隱几翁)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성효관(成效寬)이고, 어머니 풍산심씨(豊山沈氏)는 좌승지심사공(沈思恭)의 딸이다. 대사헌성세정(成世貞)의 증손이며, 병조 정랑성이민(成以民)의 친형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3년(선조6) 나이 28세 때 생원 · 진사시(生員進士試)의 양시兩試)에 모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후릉(厚陵)참봉(參奉)종묘서(宗廟署)부봉사(副奉事)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가 서쪽으로 파천하자, 장악원(掌樂院)직장(直長)이경전(李慶全)과 함께 제실(諸室)의 묘주(廟主)를 받들고 임금 일행을 뒤쫓아 정주(定州)로 갔다. 거기에서 사옹원(司饔院) 직장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27) 평시서(平市署) 직장으로 있을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9세였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21년 만에 대과에 합격한 셈이다.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대교(待敎) · 봉교(奉敎)를 거쳐 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었다. 1596년(선조29) 예조 좌랑 · 병조 좌랑을 거쳐, 이듬해 예조 정랑으로 승진되었고, 시강원 문학으로 옮겼다가, 사간원 정언(正言) ·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사간원 헌납(獻納) ·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되었다. 1598년(선조31) 특명으로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그때 그의 자급(資級)은 낮았으나 가망(加望)하여 제수하였기에 대간에서 탄핵하였지만, 선조는 그를 아껴서 그대로 승지에 임명하였다. 1598년(선조31)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예조 · 병조의 참의를 거쳐, 1600년(선조33)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다시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1602년(선조35) 대사간에 임명되어, 천추사(千秋使)로서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돌아올 때에 행낭(行囊) 속에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청렴함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1606년(선조39)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이조 참의로 옮겼다. 선조 말년에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이 정권을 잡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 광해군(光海君) 대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는데, 그는 유영경과 친숙하여 그의 주장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른바 ‘유당(柳黨)’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정인홍(鄭仁弘) 등은 이에 반대하여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1608년(선조41) 선조가 승하하고, 정세가 크게 변하자, 그는 신변의 불안을 느껴 즉시 벼슬을 그만두었다.

광해군 시대 수난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大北)정인홍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고 소북(小北)의 유영경을 공격하여,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시켰다가 사사(賜死)하였다. 소북의 이른바 ‘유당’으로 지목되던 성이문 등도 모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북인(北人)이 대북 · 소북 양파로 분열되었는데, 이른바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산해(李山海) · 이경전 부자와 정인홍 · 이이첨 · 박건(朴楗) 등이 중심인물이었고, 이른바 소북은 유영경 · 성이문 · 남이공(南以恭) 등이 핵심인물이었다. 선조 말년에 유영경이 7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끌어들인 성이문 · 김신국(金藎國) · 민경기(閔慶基) · 박안현(朴顔賢) · 신광립(申光立) · 신요(申橈) · 송일(宋馹) 등을 ‘유당’이라고 부르는데,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자는 주장을 폈다. 남이공은 유당에 들어가지 않고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에 대하여 다르게 주장하였는데, 김신국 · 남이신(南以信) · 박이서(朴彛叙) · 임연(任兗) · 임장(任章) 등이 남이공을 지지하여 이른바 ‘남당(南黨)’이라 하였다.

광해군 시대 정치가 점차 어지러워지자, 그는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한가한 여생을 보냈다. 대북의 정인홍과 이이첨 등은 정권을 잡고 그의 둘째 아들 사인(舍人)성준구(成俊耈)를 귀양보냈다. 그러나 성이문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은거생활을 하였으므로, 아들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지 아니하였다. 1618년(광해군10)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仁穆王后)를 폐위하려고 폐모론(廢母論)을 내세우고 모든 관료들에게 정청(庭請)을 강요할 때 우의정한효순 등이 백관을 인솔하고 정청하여 폐모론을 주장하였는데, 실록의 기록(『광해군일기』광해군 10년 1월 4일조)에 따르면, 성이문도 이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때 서인은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였으나, 북인의 대북 · 소북은 모두 이에 찬성하였던 것 같다. 광해군 시대 성이문은 정권에서 소외되어 칩거생활을 하였으나, 소북의 영수로서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은거한 지 11년 만인 1618년(광해군10) 4월 18일 자택에서 죽으니, 향년이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이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고 민첩함이 뛰어났다. 장성해서는 남에게 베풀기에 힘쓰고, 문사(文詞)도 절묘하였으므로, 청천(聽天)심수경(沈守慶)과 지천(芝川)황정욱(黃廷彧)이 그의 자질을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성품이 본래 인자하고 기상이 온화하였으나,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매우 확고하였다. 사무를 처리할 적에는 관대하게 하도록 힘썼으나 자신에게는 아주 엄격하게 하였다.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옳은 것은 찬성하였지만, 그른 것은 그 이해(利害)를 따져서 만류하였으므로, 그때마다 선조의 얼굴빛이 변하였다고 한다.

비문과 후손

그의 손자 홍주목사성후설(成後卨)의 친구 호주(湖洲)채유후(蔡裕後)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호주집(湖洲集)』) 부인 순창조씨(淳昌趙氏)는 호조 좌랑조흔(趙昕)의 딸인데, 자녀는 4남 6녀를 두었다. 그가 죽은 지 5년만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신원(伸寃)할 때 복작(復爵)되었고, 2남 성준구(成俊耈)는 유배에서 풀려나서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4남 성희구(成僖耈)가 의금부 낭관(郎官)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되어 그 아버지 성이문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무록(丁戊錄)』
  • 『해사록(海槎錄)』
  • 『혼정편록(混定編錄)』
  • 『팔곡집(八谷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포저집(浦渚集)』
  • 『호주집(湖洲集)』
  • 『이재유고(頤齋遺藁)』